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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혁명과 발전

사변 후의 국내 정세

항일 투쟁에 꾸준한 업적을 올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통령 중심제의 헌법을 배경으로 집권 세력을 강화하였으며, 사변 중인 1952년에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켜 점점 그 독재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독재 경향이 차차 뚜렷해지자 내각 책임제를 내세우는 야당 세력과의 대립이 생겼으며, 휴전 협정 성립 후에는 일부 정객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끼고 영구 집권을 도모하기 위하여 헌정 질서를 무시하는 행동을 거듭하였다. 1954년 선거에서 강압적 수단으로 압승하자 초대 대통령 중임 제한 철폐를 규정한 개헌안을 무리하게 통과시켰고, 한편 경제적으로는 한국 재건 원조금을 낭비하였으며, 신흥 재벌들에 대한 각종 특혜를 주어 경제 질서를 혼란하게 함으로써 국가 재건을 좀먹었다.

집권 세력의 독재 경향이 현저해 감에 따라 정계에서는 범 야당 운동이 일어났으며, 국민들도 차차 이에 호응하게 되어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국민은 야당 출신 부통령을 선출하였으며, 1958년 총선거에서는 집권당의 개헌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자유당 정부에서는 국가 보안법, 지방 자치법의 개정을 꾀하였고, 야당계 언론 활동의 탄압을 강화하였다.

4⋅19 의거

독재를 꿈꾸던 자들의 횡포는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계기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선거에 자신이 없었던 집권 세력이 갖은 부정을 다하게 되자, 정의에 용감한 전통을 지닌 젊은 학도들의 궐기와 국민의 누적된 불만이 동시에 폭발하였던 것이다. 자유와 민권 수호의 민주 투쟁은 3⋅15 선거 전인 2월, 대구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났으며,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 선거 규탄의 대규모 시민 항거가 일어나더니, 마침내 서울 시내의 모든 학생들이 총궐기하였다. 4월 19일 독재 정권 타도와 부정 선거 규탄의 소리는 전국에 진동하였으며, 시민마저 이에 합세하였고, 또한 전국으로 파급되어 갔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를 억제하고자 하였으나, 25일의 대학 교수단의 시국 선언문 발표와 데모를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니, 영구 집권을 꿈꾸던 독재 정부는 12년 만에 타도되고 4월 의거가 성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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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기념탑
4⋅19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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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후의 혼란

4월 의거는 기미 독립 운동, 광주 학생 운동에서 발휘되었던 우리 학생들의 구국 정신이 다시금 내외에 과시된 운동이었으며, 또한 불의와 독재에 대하여 맨주먹으로 싸워 이긴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중 혁명이었다.

그러나, 혁명 뒷수습을 담당한 과도 정부의 관리하에 실시된 총선거를 거쳐 새로 구성된 제2공화국의 집권 세력은 국민이 기대하는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집권당 내에 신⋅구의 파쟁이 벌어져 정권의 안정을 보지 못하였으며, 잇권에 얽힌 정실 인사로 정치 기강이 문란하였고, 경제 시책의 실패로 인플레가 일어남과 아울러 농촌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한편, 오랜 독재에 눌려 오던 민중들 가운데는 자유를 그릇 해석하는 방종적 행동으로 흐르는 자가 속출하여 각종 명목의 데모 속에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였다.

5⋅16 혁명

4월 의거 이후 민주적 안정 세력이 자리잡히지 못함으로써 사회의 혼란과 불안이 증대되는 가운데 38°선 이북의 공산 세력의 야심이 꿈틀거리게 되자, 파쟁과 혼란을 일소하고 공산 침략에서 국가와 민족을 건지기 위하여 일어난 것이 5⋅16 혁명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한 청년 장교들은 혁명을 단행하였다. 이것이 5⋅16 혁명으로, 이 혁명은 4⋅19 의거의 계승이었으며 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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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혁명
5⋅16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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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정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조직하여 군정을 펴며, 국민 앞에 6대 공약을 제시하고 국정 개혁, 사회 기풍 쇄신, 조국 방위에 매진하게 되었다.

한편, 경제 안정이 있어야 국가 발전을 기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경제 자립에 매진하게 되었다. 2년 유여의 군정은 국정 개혁, 부정 부패 시정, 관기 확립, 사회 안정에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민주 국가의 구현을 위한 민정 복귀가 시급히 요청되었다.

제3공화국의 오늘

1963년 말의 대통령 선거와 국회 의원 선거를 거쳐 국민이 기대하던 민정 복귀가 이루어져 12월 17일 제3공화국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제3공화국은 자주 독립, 경제 자립, 조국 근대화를 지향하여 다변 외교, 사회 쇄신, 봉건적 잔재의 타파, 문화 발달에 매진하는 한편,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완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외교 활동을 확대하여 유럽 열강과의 제휴를 꾀하였고, 아프리카 및 아시아 각국으로 진출하였으며, 구원이 사무친 일본과의 국교를 성립시켰다. 군사적으로는 국방력을 강화 정비하여 침략에 대비하는 한편, 세계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1964년 공산 침략에 신음하는 베트남을 구하고자 파병을 단행하여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1966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소정 목표를 달성하여, 해방 후 20년의 숙제였던 기간 산업 확충을 이루어, 발전을 위한 기초 작업을 끝냈다. 현재 우리 나라는 경제 자립의 완수를 위하여 1971년에 끝날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단기 완성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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