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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고대 사회
  • 3. 삼국 시대의 발전
  • (1) 고대 국가의 성립

(1) 고대 국가의 성립

고대 국가의 성격

고대 국가는 삼국 초기에 발전한 철기 문화의 기반 위에서 각 지방의 부족장 세력들을 통합하면서 성립되었다. 고대 국가가 성립되던 시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족 국가 시대부터 주동 세력이었던 친족 공동체의 장이 우세한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노비와 일반 민중을 확실히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그러한 각 지방의 지배 세력들이 왕권에 복속하는 대신, 지배자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전 지배 계급이 결속할 수 있는 정치 제도를 마련하였다.

세째, 중앙의 관리나 군대가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 지배를 확실히 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이 중국보다 늦었다. 그 원인은,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서 고대 국가로 성장하려던 고조선이 한족의 침입으로 붕괴되었고, 그 뒤에도 한의 군현이 분열 정책으로 각 부족을 조종하여 통일 세력의 성립을 방해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의 분열 정책과 그 침입 세력에 대한 투쟁 과정은 자연히 한국 고대 국가의 성립 과정이 되었다.

고구려

고구려는 이미 태조왕 때부터 인근 부족과의 연맹을 확대하고, 요동군, 현도군과 자주 충돌하면서 고대 국가 세력을 형성하였다. 고구려가 각 부족의 통솔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무역을 통하여 각 부족들을 분열시키려는 중국의 정책도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 뒤 3세기 동천왕 때에는, 중국이 위, 촉, 오의 삼국으로 대립하고 있던 시대로서, 오는 요동군의 실권자인 공손 연과 통교하여 위를 견제하였고, 뒤에는 고구려와도 교류하였다. 중국의 군현만 상대로 싸우던 고구려는, 이 때부터 국제 관계에 대한 안목을 가지게 되어 위, 촉, 오의 대립 관계를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 공손 연은 위와 고구려의 협공을 받아 망하고, 고구려는 3세기 중엽에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통로의 요충인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위장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수도까지 함락된 일이 있었다.

그 뒤, 중국이 동진, 5호 16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북방 민족들은 지금까지 팽창해 오던 중국에 대하여 일대 반격으로 나서게 되어 진(晋)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고구려는 미천왕 때에 서안평을 점령하고, 또한 오랫동안 계속된 낙랑군을, 그리고 대방군의 일부를 점령하여 고조선 시대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민족의 방파제로 성장한 고구려의 이와 같은 팽창은, 서쪽으로는 요하에서,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격으로 요하 서쪽의 선비족인 모용씨의 침입을 받았으며, 또 백제의 북진을 막다가 고국원왕이 전사하기까지 하였다.

백제

한강 유역은 고조선이 망할 무렵, 북쪽에서 많은 이주민이 들어온 곳이었다. 여기에 고구려의 한 갈래인 위례 부락이 한강 유역에 자리잡으면서 차차 커지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백제이다.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르러 여러 부족 국가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낙랑군의 압력을 배제하면서 전 한강 유역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의 경제력은 크게 발전하여, 근초고왕 때에는 옛 대방군의 땅을 놓고 고구려와 싸우는 한편, 남으로는 마한의 나머지 땅을 병합하여 그 세력이 전라도 남해안까지 미쳤다. 동성왕 때에는 탐라국까지 복속시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4세기 중엽 진이 약화되었을 때, 백제는 부여족이 살고 있던 요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기마 민족 세력이 일찍부터 진출하여 각 지방에 식민지 국가를 세워 놓았던 일본 지역, 그리고 요서 지방, 산뚱 반도 등지와 본국과를 연결하는 고대 상업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

고조선의 멸망을 전후하여, 이주민 집단의 일부가 경상도 지역에 들어와서 각처에 부족 국가를 건설하였다. 경주 평야에 성립된 사로도 그러한 나라의 하나였다.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부족이 연맹하여 연맹장인 이사금을 선출하였으며, 이들이 주체가 되어 사로 6촌이라는 6부족 연맹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내물왕 때부터는 김씨의 왕위 세습권이 확립되었고, 왕의 위호도 왕권의 강화를 표시하기 위하여 대수장이란 뜻의 마립간으로 변하였다.

내물왕 때에는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 광개토왕의 원군이 이를 물리쳐 주었으므로, 고구려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고구려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고구려를 통하여 북중국과 교통하면서 중국 문화와 접촉하였다.

이 새로운 문화의 수입으로 자비왕과 소지왕 때에 이르러서는 국력이 강화되어, 백제와 연맹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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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금관
신라의 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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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청동기 시대부터 크게 발달한 낙동강 하류 지방은 철기 시대에 와서도 신라 지역보다 앞서 발달하여 6가야 부족 연맹이 성립되었다. 고령의 대가야와 김해의 금관 가야가 주축이 된 이 가야 연맹 세력은 낙랑, 대방, 일본과 빈번히 교류하였고, 특히 일본 지역에 진출하여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그 곳과 연결하는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뒤에 와서는 더 성장하지 못하고 백제와 신라에게 분할, 점령되고 말았다.

가야 사회는 비록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으나, 고령, 창녕 등의 가야 고분에서 발견되는 많은 유물들은 상당히 세련된 것으로서, 신라의 문화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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