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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고대 사회
  • 5.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 (1) 통일 신라의 발전

(1) 통일 신라의 발전

삼국 통일의 역사적 성격

여⋅제 양국이 망한 뒤, 당은 신라까지 침략하려 하자, 신라는 여⋅수, 여⋅당 전쟁에 뒤이은 나⋅당 전쟁을 통하여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 내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 때 요하 지역과 장백 산맥 지대를 잃어버렸으므로, 그 뒤 우리 민족의 영역은 한반도에 국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완전하게 삼국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신라가 하나의 통일 정부를 세워 같은 제도 아래에서 민족이 뭉치게 된 것은, 민족사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뜻깊은 일이었다.

그리고, 여⋅제 양국의 지배 계급이 무너짐으로써 지배 계급의 수가 적어지고, 옛 신라의 영역보다 3배나 확장된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국가 경제력이 그만큼 증가되었다. 이러한 확대된 토대 위에서 문화의 기반도 단일한 것으로 정리되어 민족 문화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정치 조직의 정비

삼국을 통일한 신라 왕실은,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므로, 옛 귀족 회의의 의장격이던 상대등의 세력보다, 왕명에 의하여 실제 정무를 처리하는 시중(수상)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통일 전의 신라는 이, 호, 예, 병, 형의 5부에 해당하는 관청을 두었다. 그런데, 신문왕 때에 와서는 공부에 해당하는 예작부를 더 두어, 중국의 6전 조직과 비슷한 정무 분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왕권의 강화와 중앙 정치 체제의 정비에 따라 유교의 정치 이념이 필요하게 되어, 신문왕 때에는 국학을 세우고 한학 교육에 힘썼다.

지방 행정 조직

지방 행정 조직으로는 기본적으로 9주를 두고, 지방 지배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소백 산맥 외곽 지대인 지금의 충주, 원주, 청주, 남원 등 네 곳과 김해에 소경을 두어 5소경 제도를 마련하여, 그 장관을 사신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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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 5소경
9주 5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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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장관을 도독이라 하였고, 주 밑에는 군과 현을 두었는데, 군에는 태수, 현에는 현령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지방 세력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지방 호족들을 인질로 중앙에 와 있게 하여 상수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기인 제도의 시초였다.

한편, 옛 고구려와 백제의 관리들에게는 그들의 재능과 신분에 따라 알맞은 관직을 주어 신라 지배 체제 안에 포섭하였다.

군사 조직

삼국의 통일 전쟁 과정에서 방대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 신라는, 고구려계, 백제계, 말갈계의 군대까지 통합하여, 신라 국방군의 중추 세력인 9서당이란 아홉 부대의 군 편성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그 밖에 지방 군관구의 성격을 가진 10개의 정을 주요 지역에 배치하였다. 또, 삼국 시대부터 시위부를 비롯하여 수도, 소경을 방위하는 몇 개의 특수 부대를 두었다.

그러나, 이같이 정비된 군사 조직을 경제적으로 유지하기 곤란했으므로,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차차 문란해졌다.

경제 생활

통일 후에는 노동력과 생산 자원이 보다 철저하게 편제되어 관리되었다. 통일 신라의 민정 문서에 따르면, 남녀별과 연령별의 정확한 인구와 소, 말, 뽕나무, 호두나무, 잣나무 등의 수까지도 3년마다 한 번씩 통계를 내고 있었다. 이와 같이, 평민이나 부 곡, 소의 천민 집단 및 노비의 노동력이 철저하게 동원됨으로써 경제 생활은 귀족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귀족들은 녹읍을 가지고, 그 곳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고, 노동력을 마음대로 징발하였다. 그리고, 섬이나 산간에 목장을 가지고 가축을 사육하는 한편, 장리변을 놓아 고리대업을 하였다.

이러한 귀족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관리에게 관료전이라는 토지를 주고 그 대신에 귀족들의 녹읍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에게도 정전을 주어 경작하게 하고, 국가에 조를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다시 귀족들에게 녹읍을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사원의 면세 토지가 날로 증가하여 국가 경제는 위태롭게 되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경주에 금입택이라는 호화 주택들을 짓고 향락 생활을 즐겼다. 그리하여, 전날의 굳건한 기상은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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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제 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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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농업이나 목축업뿐만 아니라 수공업도 성하여 견직물, 마직물의 방직 기술과 금은 세공, 나전 칠기 등의 공예품 제조 기술이 놀랍게 발달하여, 경주에는 통일 전에 설치된 동시 외에 서시, 남시가 설치되는 등 크게 번영하였다.

해외 무역의 발달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당 및 일본과의 무역이 크게 성하였다. 당시 대당 수출품은 어아주, 조하주라는 견직물과 가는베, 그리고 해표피, 삼, 금은 세공품 등 이었고, 수입품은 비단과 책, 귀족들이 필요로 하는 사치품들이었다.

이 때, 당의 산물과 아울러 서역의 상품들도 수입되었다. 당으로 가는 해로는 지금의 전남 영암에서 상하이 방면으로 가는 길과, 경기도 남양만에서 산뚱 반도로 가는 두 길이 있었다.

한편, 경주에서 가까운 울산항이 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성하였다. 그리고, 신라인이 당에 자주 드나들면서 당에는 신라인들의 거주지인 신라방이 각처에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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