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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고대 사회
  • 6. 통일 신라의 문화
  • (1) 학술의 발달과 불교 철학의 확립

(1) 학술의 발달과 불교 철학의 확립

통일 신라의 문화 기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새로 확대된 경제적, 사회적 기반 위에서 각기 개성을 가지면서 발전되어 온 여⋅제 양국 문화의 토대를 확립시켰다. 그리고, 밖으로 당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제 문화 조류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한층 더 세련된 문화로 발전시켰다.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문학, 과학, 예술의 각 분야에 걸친 상층 문화만 발달한 것이 아니라, 귀족 종교로 머물러 있던 불교가 일반 민간에게까지 널리 퍼져 국민 생활 전반을 자극함으로써 민간 문화의 수준도 한층 높아졌다.

한학과 기술학

오늘날은 기록이 없어져서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삼국 시대 및 통일 신라의 학술은 일반적인 한학과, 기술 분야인 의학, 병학, 역학, 산학, 율학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사회 생활을 실제로 이끌어 가는 학문의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한학에 있어서는 통일 초의 문장가로서 강수를 들 수 있는데, 그는 특히 외교 문서 작성으로 당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그 뒤의 설총은 경서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한자의 뜻과 음을 따서 기록하는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학 학습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한편, 사회와 정치를 운영함에 있어서 유교 이념이 필요하게 되자, 신문왕 때에는 국학을 설립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가르치도록 하였다.

신라 하대에 들어와서, 관리 임명을 골품 제도에 따르지 말고 학문 성적에 의하여 하자는 새로운 원칙을 세워, 원성왕 때에는 국학에 따로 독서 출신과를 두어 성적을 3품으로 구별하여 관리를 채용하였다. 이 제도는 골품 제도로 말미암아 제대로 실시되지는 못하였으나, 학문을 보다 널리 보급시키는 데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통일 초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한문학은, 성덕왕 때에 김대문이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등을 저술하여 자기 문화를 의식하게 되면서부터는, 이제까지 중국 것을 그대로 모방하던 단계에서 이탈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하대에 와서 당에서 공부한 유학생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김운경, 김가기, 최치원 등이 있었다. 특히,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은 문란해진 정치를 바로잡고자 진성 여왕 때에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그가 지은 계원필경과 비문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최치원의 7언 율시

스님아, 청산이 좋다 말을 말아요.〔僧乎莫道靑山好〕

산이 좋다면 왜 다시 나옵니까.   〔山好何事更出山〕

날 보시오, 훗날 내 종적을.      〔誠看他日吾蹤跡〕

청산에 한번 들면 다신 안 나오리.〔一入靑山更不還〕

한편, 한문학이나 유학 외에 천문, 수학, 역학, 의학, 병학 등의 기술학도 크게 발달하였는데, 김유신의 후손인 김암은 병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의학은 삼국 시대에 수입되었던 중국 의학이 더욱 발달하였다.

한편, 신라 말의 승려 도선은 지리 도참설이라고 하는 중국의 지리학을 수입하였다. 이것은 인문 지리적인 인식과 예언적인 도참 신앙이 결부된 학설이었다. 이를테면, 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송악이 나라의 수도가 될 만한 곳이라고 하는 것이든지, 각 지방에 있어서도 그 지세에 따라 좋고 나쁜 곳이 있다고 하는 것 등이다. 이것은, 그 때까지 경주 세력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행정 조직을 고치고 국토를 재편성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까지 발전하여, 신라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향가

한문학은 주로 귀족 사회에서 발달하였으나, 설화를 중심으로 한 불교 문학이 민간에 퍼졌다. 그리고, 향가도 불교의 영향으로 세련되면서 크게 발달하였는데, 승려나 화랑들 사이에서 많은 작품이 나왔다. 월명사와 충담사는 향가 작자로 유명하였고, 진성 여왕 때의 대구화상은 역대의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이란 향가집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14수와 고려 초의 균여가 지은 11수를 합하여 25수뿐이다.

도솔가

오늘 이에 산화 노래 불러

베푸는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시키는 대로

멀리 도솔원의 미륵님을 모셔 오라.

신라의 불교 철학

삼국 중 가장 뒤떨어졌던 신라 사회가 통일기에 들어와 불교 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신라 불교 자체의 사상 체계를 성립시켰다. 원래, 우리 나라에는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가 뒤섞여 들어왔고, 대승 불교도 여러 갈래가 들어와 사상적 통일을 보기 어려웠다. 더우기, 삼국 시대 초기의 불교는 토착 신앙을 포섭하면서 선교하였으므로, 뒷날까지 토착 신앙과 뒤섞인 샤아머니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통일 후 원효는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와 같은 명저를 남김으로써 불교를 이해하는 기준을 확립하는 동시에, 불교를 대중화시키는 데 노력함으로써 신라 불교의 후진성을 극복하였다.

또한, 원효와 같은 시대의 고승인 의상은 신라 화엄종을 창설하였고, 원측은 당에 들어가 유식 불교의 깊은 뜻을 깨달아, 현장의 사상을 계승한 규기와 대항하여 당의 서울에 있는 서명사에서 자기 학설을 강의하였다.

한편, 불교 연구를 위하여 인도에 가는 승려가 많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인 혜초는 당에서 바닷길로 인도에 들어가서 각지를 두루 순례하고 돌아왔다. 이 때의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인도와 서역 지방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노장 사상

신라 중대 이후, 귀족 문화의 발달이 절정에 이르러 그 생활이 사치스럽게 되었는데, 바둑을 두고 새로운 교양으로서 한시를 읊는 등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말기로 내려오면서 차차 향락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한편, 그러한 퇴폐적인 것에 반발하는 은둔적인 사상 경향도 생겨, 도교와 노장 사상도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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