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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고려 사회
  • 1. 고려의 건국과 국가 체제의 정비
  • (1) 호족 연합 세력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1) 호족 연합 세력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고려의 건국

진성 여왕 이후 신라 귀족 사회의 부패와 정치 혼란이 심해지자, 견훤은 지방의 군사 세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하여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고(900), 전라도 전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 뒤, 초적1) 살기 어렵게 된 농민들이 도둑이 되는 일이 많았는데, 이들이 모여서 지방에서 제각기 반란 세력을 형성하였다. 초적이란 이들을 가리킨 말이다.의 무리를 세력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궁예가 나라를 세워(901) 후고려2) 삼국 시대부터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하였다. 여기서 ‘후고려’라 함은 후고구려라는 뜻이다.라 하더니, 뒤에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다. 궁예는 한강과 임진강 유역의 호족 세력들을 통합하고, 골품 제도에 의한 신라의 지배 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관제까지 마련하였다.

후백제와 태봉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신라는 날로 쇠약해져서, 그 영역이 경상도 지방으로 줄어들었는데, 밖으로는 견훤과 궁예의 세력을 꺾을 힘이 없었고, 안으로는 쇠약해진 귀족 정치를 개혁할 힘도 없는 상태에 놓였다.

한편, 송악(개성)의 토호였던 왕건은 예성강의 해상 세력과 힘을 합하여 그 일대의 지배 세력으로 성장하더니, 궁예의 부하가 된 후에는 그의 해군 세력으로 금성(나주)을 점령하고 후백제를 견제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 때, 궁예는 신라 지역에 자주 침입하여 세력을 확대시켜 갔으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만한 정치적 경륜이 없었고, 성격마저 포악하였으므로, 홍유, 신숭겸 등이 궁예를 몰아 내고 왕건을 추대하였다.

왕건은 고구려의 후계자란 뜻에서 국호를 고려라 하고(918), 다음 해에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다. 그는 새로운 국가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조세를 가볍게 하는 한편, 양민으로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켜 주는 등 모범을 보였다.

왕건 태조가 이와 같은 정치를 실시하자, 많은 호족들이 심복하여 오게 되어, 궁예 때보다 세력이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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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의 형세도
후삼국의 형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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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유민의 포섭과 국제 관계의 변동

이 때, 중국의 북쪽에서는 5대의 다섯 나라가 교체되고 있었으며, 양쯔 강 이남에는 오월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편, 만주 서부에서는 몽고족의 일파인 거란이 일어나서, 남으로는 북중국에 압력을 가하고 동으로는 발해를 침략하였다. 발해는 이에 대항하였으나 무너졌고(926), 고구려 계통의 유민들은 고려에 포섭되었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의 국계 관계가 복잡하게 되자, 각국은 무역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서로 상대편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 배후의 세력들과 교통하였다. 고려도 중국의 각국들과 교통하였으며, 후백제는 남으로 오월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북으로 거란과 무역하면서 고려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키려 하였다.

후삼국의 통일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이 격심해짐에 따라, 견훤은 고려와 교통하고 있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경주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을 함부로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의 인심이 고려로 기울어졌으므로, 왕건은 신라를 병합하였다(935). 그리고, 다음 해에는 후백제군의 주력을 선산에서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후삼국으로의 분열은, 옛 고구려, 백제 지역에 대한 신라 귀족들의 수취가 심하여,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왕건은 그 분열의 주요 원인인 수취 체제의 결함을 고치고 새로운 사회 건설의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삼국을 다시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사회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후삼국의 통일과 발해 유민의 포섭은, 분열되었던 민족의 통합을 보다 확고하게 하였다.

태조의 정책

태조의 국가 정책은 항상 세 가지 원칙에서 일관하였는데, 그 하나는 호족 세력을 통합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진 정책의 추진으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교를 존숭하는 것이었다. 고려 시대의 역사적 사명이었던 이 세 가지 정책을 실천함에 있어서, 사회의 변화와 국제 관계의 변동으로 파란 곡절이 많았으나, 그 기본 정신은 일관되어 나갔다.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 호족 세력을 어떻게 편제하여 통합을 굳건히 하느냐 하는 문제는 고려의 주요한 과제였다. 초기에는 왕실이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거나, 호족 상호간의 결혼을 장려하는 등 정략 결혼의 방편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뒤에 와서는 태조가 정계, 계 백료서를 지어, 관리 된 자의 의무를 밝히고, 지방 호족들의 일반 농민에 대한 수취를 금하는 대신, 호족들을 중앙의 관리로 임명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리하여, 초기의 중앙 관제는 신라와 태봉의 관제를 병용하였으나, 차차 중국의 관제까지 수용하면서 많은 호족들을 중앙의 관리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지방 관제는 아직 정비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기인 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통하여 지방을 통솔하였다.3) 지방 호족에게 호장, 부호장이라는 향리 벼슬을 주어 지방 자치의 책임을 맡게 하는 동시에, 그 자제들을 인질로 수도에 올라오게 하였는데, 이를 기인이라 하였다. 한편, 나라에 공이 있어 중앙의 고관이 된 사람에게는 자기 고향의 사심관이 되도록 하였는데, 사심관은 부호장 이하의 향리를 임명할 수는 있으나, 그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는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

또,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는 한편, 평양에 서경을 설치하여 이를 기지로 하여 북방 개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요동 지방은 이미 강대해진 거란이 점령하고 있었고, 고려와 거란 사이에 있는 여진족의 세력이 완강하여, 만주 지역의 회복은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다만, 태조 말년에 와서 반도 북부에 침투하여 살고 있던 여진족을 축출하고, 북서쪽으로는 청천강, 북동쪽으로는 영흥까지 북진할 수 있었다.

한편, 태조가 자손들에게 남겨 준 훈요 10조를 보면, 불교를 숭상하여 연등 행사를 성대하게 하도록 하고, 민족의 전통적 제전인 팔관회를 매년 열게 하는 등, 불교와 재래의 종교나 관습을 중시함으로써 인심을 수습하여 왕실의 안전을 도모하도록 훈계하고 있다.

왕권의 안정

태조를 이어 혜종이 즉위하자, 태조의 여러 왕후에서 난 아들들과 그 외척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가 벌어졌다. 이러한 암투는 원래 태조가 호족을 통합하기 위하여 여러 호족과 정략 결혼을 한 데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만 해도 모계만 다르면 남매들 사이에도 혼인할 수 있는 고대 결혼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왕실 자손 간에 혼인을 함으로써 자연히 외척 세력의 대립이 커진 데도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서 왕규는 혜종 암살을 음모하다가 처형당하고, 혜종과 정종도 그와 같은 싸움에 휩싸여 왕위에 오래 있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광종은, 이와 같은 외척과 호족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노비 안검법을 단행하고, 태조 이래의 구신들을 도태시켰다. 그리고,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족벌 세력에서 관리를 뽑지 않고 학문 성적에 따라 신진 관리를 채용하는 원칙을 세웠다. 광종의 이러한 과단성 있는 정치는 신⋅구 세력의 세대 교체를 이루어 놓았으며,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 기반을 확립할 수 있는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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