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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고려 사회
  • 2. 귀족 사회의 발달과 문화의 성장
  • (2) 고려 문화의 성장

(2) 고려 문화의 성장

고려 문화의 성격

고려 호족의 무덤인 거창 둔마리 고분 벽화에서 보이는, 복스럽게 생긴 둥근 얼굴을 가진, 붉은 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그림이라든지, 극도로 단순화된 석인의 조각은 고려 시대 지방 문화의 소박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소박성은 고려 지방 사회의 생명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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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마리 고분 석인
둔마리 고분 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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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화는 이러한 기본 생활 능력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성격을 띠면서 성장하였다.

첫째로, 골품 제도의 기반 위에서 성장하였던 신라의 귀족 대신에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 집권 체제의 관리가 되면서 문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둘째로, 오랜 사회적 진통 끝에 구축된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유교의 정치 이념을 표방하게 되자, 불교 문화와 유교 문화가 융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세째로, 정치, 사회, 문화의 활동이 전시대의 혈족적 관념과 종교의 테두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남으로써 문화의 폭이 그만큼 넓어지고 중세적인 지성이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유학과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고, 대장경의 간행, 실록의 편찬, 개인 문집의 출판 등 기록에 의한 문화 활동이 크게 확대되었다.

유학과 한문학의 발달

광종 때 과거 제도를 마련하여 새로운 지식 계급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성종 때에 서적을 수집하고1) 성종 때, 서경에는 수서원을 두고 개경에는 비서성을 두어, 많은 서적을 등사하고 수집하였다. 그 뒤, 정종과 문종 때에는 유교 서적뿐만 아니라, 사학, 의학 관계 서적도 출판하여 지방에 배부하였다. 교육을 장려하여, 유교 정치를 할 수 있는 지식 계급을 형성시키면서 고려 정치의 사상 체계는 성립되었다. 이 때, 활약한 사람은 최승로와 김심언이었다.

이 새로운 지식 계급에 의해 실시된 유교 정치는 한문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때의 한문학은 중국 것을 그대로 모방하던 신라 말의 단계를 벗어나, 점차 독자적 성격을 가졌다. 그리하여, 시문을 짓는 것이 지식인의 필요한 교양이 되었고,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유교 경전의 문구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면서도 강한 주체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당시의 지도층이 사회를 개혁하고 새 문화를 창조하는 독자적인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초기의 학풍도 덕종 말년에 와서, 왕가도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북진파가 내몰리고, 인주 이씨 일파가 집권함에 따라 차차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주적인 유교 정신을 강조하기보다는 귀족 사회의 안일함을 찬미하는 한문학이 성하여 갔다.

문종 때에 활약한 최충의 유학도 집권층의 안전만 도모하는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가 사학을 세워 후배를 가르치자, 다른 학자들도 이에 따라 많은 사학을 일으켰으므로 사학 12도가 생겼다.

그 뒤, 숙종 때에 와서는 국자감을 강화하고자 서적포를 두어 도서 출판을 활발히 하였으며, 예종은 사학에 밀리고 있는 관학을 부흥시키려고 국학에 7재라는 전문 강좌를 두었다. 이 관학 7재는 과거 시험 준비 기관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또, 예종은 양현고를 설치하여 관학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인종 때에 와서는 지방에 향학까지 설치하였다.

당시의 이름난 학자로는 김인존, 김부식, 정지상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의 한문학 수준이 높아 감에 따라 문인들의 저술도 많아졌으나, 지금 전하는 것은, 금석문 외에는 11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가락국기, 균여전, 대각국사 문집과, 12세기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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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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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정덕본)
삼국사기(정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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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종 때에는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어 많은 역사 기록이 소실되었으므로, 현종은 태조 때부터 목종 때까지의 7대 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덕종 때에 완성하였다.

이 밖에, 사서로는 문종 때 박인량의 고금록이 있었고, 예종 때 홍관은 그전부터 전해 오던 편년통재의 뒤를 이은 속편년통재를 편찬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불교

불교는 고려 시대에 와서도 국교로서 크게 발달하였다. 사원은 사원전 외에 왕실과 귀족의 희사로 토지와 노비가 증가하였고, 광종 때에는 승과 제도를 마련하여 승려에게 법계를 주었으며, 문종 때에는 별사전이라 하여 승려 개인에게까지 토지를 주었다.

그러나, 신라 말부터 시작된 5교 9산의 사상적 대립은 그대로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교⋅선의 교리와 사상을 절충한 중국의 천태종을 국초부터 받아들여 연구하였으며, 광종 때 고려승 의통과 체관이 오월에 건너가 오히려 중국의 천태종을 부흥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즉, 의통은 중국 천태종의 13대 교조가 되어 그 곳 교세를 떨치게 하였고, 체관은 천태사교의라는 명저를 남겼다. 이것은 천태종의 기본 교리를 정리한 것으로, 천태종 발달에 주요한 공헌을 하였고, 오늘날까지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천태종의 사상은 깊이 연구되었으나, 초기에는 종파로서는 성립되지 못하고 있더니, 후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에 건너가서 송의 불교계를 시찰하고 천태 사상을 더 연구하여 해동의 천태종을 창설하였다.

불교가 발달함에 따라 고려는 사상의 통일과 지도를 위하여, 현종 때부터 조판을 시작하여 문종 때에 와서 제1차로 6000여 권으로 된 고려 대장경의 간행을 완성하였다.

그 뒤, 대각국사는 송, 요, 일본 등지에서, 대장경에 빠진 불경을 수집하여, 먼저 신편제종교장총록이라는 불서 목록을 만들고, 이에 의하여 4700여 권을 다시 출판하였는데, 이를 속장경이라 한다.

이 속장경에는 불경도 포함되어 있으나, 불교 연구서인 논(論), 소(疏), 초(抄) 등도 모은 것을 보면, 대각국사가 불교 사상 정리에 얼마나 노력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저서인 원종문류나 석원사림도 그러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귀족 문화가 크게 성함에 따라 일부 지식층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귀족 문화에 대하여 반성하는 성격을 가진 노장 사상이나 도교 사상이 불교와 혼합되어 유행하게 되었다. 이자현이나 곽여 같은 이는 그러한 경향의 중심 인물이었다.

민간 신앙

백성들의 불교 신앙은 재난을 피하고 복을 구하는 기복 불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도교 역시 그러하였다. 한편, 무당들의 샤아머니즘은 불교와 도교를 가미하면서 그대로 성하였다.

또, 고려 일대에 걸쳐서 풍수 지리 사상이 크게 퍼졌으며, 일반 주택, 묘지, 도읍지, 사원의 자리 등을 정함에 있어서 이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를테면, 서경에 도읍을 옮기면 나라가 크게 부흥한다는 서경 길지설도 그와 같은 것으로, 이것은 인종 때 묘청의 난을 일으키게 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고려 예술의 성격

고려 시대에 와서도 전시대부터 발달해 온 불교 미술이 그대로 성하였으나, 석탑, 석등, 불상 등 조각 분야에서는 퇴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귀족들의 생활 기구를 중심으로 한 미술, 공예품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이 자기, 나전 칠기 및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구 등의 제작이 양적으로 증가하고 질적으로 보다 세련된 것은, 귀족 생활의 내용이 훨씬 풍부해졌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고려의 미술은 불교 문화에 젖은 귀족 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한 것이다.

건축

고려 건축으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고려의 왕궁터인 만월대나 당시의 사원터를 보면, 경사진 지대에다 층단식으로 건물을 지어 전체적인 외관이 높고 웅대하게 보이는 양식을 취하고 있다. 건물의 기둥을 안쪽으로 약간 기울게 하면서 세우는 방법과, 둥근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불룩하게 하여 건물이 안정감 있게 보이도록 하는, 삼국 시대부터의 건축 양식이 고려 시대에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그리고, 지붕의 처마끝과 주춧돌과의 각도가 30도 내외가 되도록 하여 태양 광선이 비치도록 하였다. 이것은 동지와 하지의 정오 때의 태양 광선의 각도를 측정하여 그 평균값을 내어 적당한 햇빛을 취할 수 있도록 조절한 것이다.

목조 건축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봉정사의 극락전, 그리고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 등 몇 개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부석사의 무량수전으로서, 고려 건축의 주심포2) 주심포란 지붕 머리와 기둥, 서까래 사이에 있는 짜임새(포, 두공)가 기둥 위에만 있는 양식을 말한다. 양식의 엄정하면서도 조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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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실측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실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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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에 있어서는 신라 계통의 석탑 모형을 그대로 계승한 것도 있으나, 탑신은 훨씬 높고 옥개석이 작아 불안정한 것, 또는 탑신이 아주 낮아 옥개석만 포개 놓은 듯한 것 등 정돈된 형태를 중시하지 않는 양식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처럼 평면이 팔각 또는 육각으로 된 것 등이 있는데, 이것은 송대 석탑의 모형을 받아들인 것이다. 또, 원대의 영향을 받은 경천사 10층 석탑은 목조 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조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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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팔각 9층 석탑
월정사 팔각 9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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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신라 계통에서 이탈하여 여러 가지 형식의 것이 시험되는 단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부도에 있어서는 지광국사 현묘탑과, 홍법 국사 실상탑이 대표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불상과 공예품

불상으로서는 부석사에 있는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이 신라 불상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고려 시대 제일의 걸작품이다. 은진의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거대하기는 하나 전체적인 균형이 잡혀 있지 않아 미술적 가치는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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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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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에 와서 걸작품은 많지 않으나, 규모가 큰 철불이 많이 주조되었다.

고려의 종으로는 천흥사 종과 수원의 용주사 종, 해남 대흥사에 있는 탑산사 종 들이 유명하다. 이것들은 신라 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서, 모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나전 칠기의 기술은 원래 신라 때 당에서 수입된 것이나, 중국에서는 송 이후에 그 기술이 퇴화하였고, 오히려 고려에서 크게 발달하였다. 그것은 불경을 넣는 경함이나, 화장품갑, 문방구 등에 자개를 붙여 무늬를 내는 것으로서, 그 기술은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한편, 청동기의 바탕에 은으로 장식 무늬를 상감하는 은입사(銀入絲)라는 기술이 송에서 들어와 크게 발달하여, 청동 은입사 포류 수금문 정병과 향로와 같은 걸작품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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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은입사 포류 수금문 정병
청동 은입사 포류 수금문 정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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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자기

고려자기는 원래, 10세기에 들어오면서 신라의 토기가 점차 자기로 바뀌어 가는 우리 나라 자기의 초기적 발전이 있어 오다가, 송의 수법을 받아들여 크게 세련되었다. 그리하여, 11세기에 이르러서는 고려자기의 독특한 미를 완성하게 되었다.

즉, 비색이라 하여 아무런 장식도 없는 푸른 하늘색과 아름다운 선을 특징으로 하는 순수 청자가 발달하였는데, 차차 그릇 표면을 양각 또는 음각을 하여 무늬를 넣는 단계에 이르고, 이것이 다시 백토나 흑토를 그릇 표면에 새겨 넣어 무늬에 상감하는 이른바 상감 청자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상감은 검은색, 흰색의 장식을 넣어 미의 변화와 율동을 가져온 것으로서, 고려에서 발달한 기술이다.

청자로 만든 그릇의 종류도 다양하여, 항아리 등 식기를 비롯하여 문방구, 향로, 화장품갑 등 일상 용품에까지 이르고, 드디어는 청자 기와와 청자 바둑판까지 만들었다. 이것은 당시의 귀족 생활이 얼마나 호화로왔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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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막새기와
청자 막새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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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

서도에서는 문종 때의 유신, 인종 때의 승려 탄연, 최충헌의 아들 최우를 명필로 꼽아, 신라 시대의 김생과 더불어 신품 사현이라 일컬었다.

무신 집권 때까지는 왕희지체와 구양순체가 유행하더니, 충선왕 때부터는 조맹부체가 들어와 유행하여 조선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림에 있어서는 인종 때의 화가 이영과 그 아들 이광필, 명종 때의 고유방 등이 유명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가 있어 당시의 화풍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원대의 북화의 영향을 받아 필치가 뚜렷하고 세밀한 표현에 능한 것이다. 이 밖에, 모란, 들국화를 그린 수덕사의 벽화, 사천왕상과 보살상을 그린 부석사 벽화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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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대렵도
천산대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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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제작된 회화가 일본에 흘러들어가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는데, 그 중에 혜허의 양류 관음상은 장엄하고도 화려하여 불화 중에서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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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류 관음상
양류 관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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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은 신라 시대 이래의 우리 나라 고유 음악이 당나라 음악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향악이 그대로 계속되었고, 송에서 수입된 중국 고전 음악인 대성악이 궁중 음악으로 발달하면서 아악이라 이름하였다. 이 음악은 중국에서는 일찌기 없어졌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고려의 향악은 악기의 연주가 한창 무르익을 때 노래와 춤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러한 향악곡으로는 동동, 대동강, 한림별곡 등이 있었다.

이러한 음악은 또한 가면극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져, 처용무 등 탈춤을 중심으로 한 산대극도 크게 유행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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