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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신의 난과 최씨 무신 정권

무신의 난

거란의 침입이 그치자, 사회가 안정되고 고려의 지배 체제도 정비되어 갔다. 그런 반면에, 무신의 위치는 차차 격하되었다. 전시과의 토지 분배에 있어서 무신은 문신보다 낮았고, 무신들의 영업전이나 군인전 등을 문신들에게 빼앗겼다. 또한, 무신들이 출세하는 길이었던 관학 7재 가운데 하나인 무학재도 폐지되고 말았다.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일부 젊은 문신들과 더불어 향락을 일삼았는데, 왕의 향락이 거듭될수록 징발되는 서민의 재물과 노역은 증가하여, 민중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또한, 문신들은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에게 항상 멸시와 조롱을 퍼부어, 그들의 반감을 더 샀다. 이에, 드디어 의종 때 정중부,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내고 명종을 세웠다(1170).

문신들의 이와 같은 급격한 몰락으로, 문신 중심의 정치 조직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다만, 무신들의 회의 기관인 중방(重房) 아래 장군방, 낭장방 등이 있어서, 이것이 가장 중요한 명령 계통이 되었으므로, 나라의 정치는 중방을 장악한 정 중부의 지휘 아래 움직였다.

무신들은 문신들이 지내던 고관 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사전과 노비를 늘렸으며, 또 사병을 두어 저마다 싸웠다. 그리하여, 경대승은 정중부를 죽이고, 호위병을 둔 도방(都房)에 앉아서 정치를 하였으며, 그가 병사하자 이의민이 세력을 잡았고, 이의민은 얼마 후 최충헌에게 피살되었다.

사회의 동요

무신의 난 이후 무신들이 정권을 독점하자, 명종 때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다음에는 서경 유수 조위총 등이 지방군을 이끌고 중앙의 무신들을 공격하려다 실패하였다. 이와 같은 혼란이 지방에까지 파급되어, 드디어는 천민 집단들까지 난을 일으켰다. 즉,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 망소이의 난, 전주 관노들의 난, 경북 운문의 김사미 등 유민들의 난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개경에서는 노비 만적이 난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였는데, 이러한 일은 문신 중심의 지배 체제가 무너지자, 고려 사회의 모순이 노출된 당시의 사회 상태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최씨 무신 정권의 성립

이의민을 죽이고 대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왕에게 정치를 개혁하고자 10조의 시무를 올렸다. 즉, 토지의 겸병을 막고, 왕실이 일부 승려들과 결탁하여 고리대업을 하거나 원당을 지어 재산을 사원에 도피시키는 일 등을 금해야 하며, 조세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의민 등 정적을 숙청함에 따라서 그의 토지와 노비는 늘어서 광대한 농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것으로 사병을 길러서 자기 세력을 확고히 하였으나, 민란이 그치지 않아 안정될 날이 없자, 도방을 두어 자기 신변을 경호하게 하였다.

한편, 문신들은 그들이 재산을 희사하고 기탁하였던 사원으로 피하였으므로, 무신들과 승려들과의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왕실에서도 이름뿐인 왕권을 다시 회복하고자 최충헌을 숙청하려다가 도리어 명종, 희종 등 두 왕이 폐출당하였다.

최충헌은 따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정적을 감시하고 숙청하였는데, 그 장인 교정별감의 자리는 최씨 일가가 대대로 세습하면서 독재 정치를 단행하였다. 이 때, 도방과 삼별초는 이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배경이 되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자기 집에다 정방(政房)을 두어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여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으나, 전날의 무신들과는 달리 문신들을 우대하였다. 이인로, 이규보, 최자 등이 모두 최씨 정권하에서 명성을 떨친 문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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