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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고려 사회
  • 4. 몽고 침략에 대한 항쟁과 고려 말의 정치 상황
  • (1) 몽고군의 침입과 이에 대한 항쟁

(1) 몽고군의 침입과 이에 대한 항쟁

여⋅몽의 접촉

최씨 정권이 안정되어 갈 무렵, 북쪽 금에서는 거란족이 다시 내란을 일으켰으며, 여기에 칭기즈칸이 통일한 몽고 세력이 진출하여 만주 지역은 한창 어수선하였다.

고종 초에 몽고에 쫓긴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하여 왔다. 이 때, 이들은 남쪽으로 들어오다가 제천 방면에서 김취려 장군에게 대파되어 쫓겨갔고, 다음에 다시 침입하여 왔으나 고려 군대에 의해 북쪽으로 밀려 올라가다가 강동성에서 포위당하였다. 이 때, 고려는 북쪽에서 거란족을 추격하여 온 몽고 군대와, 두만강 지역에 있던 동진국(東眞國) 군대와 연합하여 강동성을 함락하였다. 이것이 고려와 몽고의 첫 접촉이었다.

몽고의 침입과 강화도 천도

몽고가 거란족을 토벌하여 준 것을 구실로 공물을 강요하여 고려는 이에 응하였다. 그러나, 공물을 받아 가던 몽고 관리가 접경 지대에서 피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몽고의 장수 살리타가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여 왔다(1231). 그리하여, 몽고 기병은 의주를 점령하고 이어서 개경을 포위하였으므로, 고려는 할 수 없이 몽고와 강화하였다.

강화를 맺은 몽고는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여 왔다. 이에, 고려는 다음 해에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다음에 저항 태세를 취하였다. 이 해에, 몽고의 장수 살리타는 한강을 건너 침입하였다가, 처인성(용인)에서 고려 승려 김윤후에게 사살되고 몽고 군대는 철수하였다.

몽고는 금을 멸한 뒤에도 자주 고려에 침입하여 왔는데, 그 때마다 일반 민중은 항쟁을 계속하였으므로 싸움은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이와 같이 계속되는 몽고의 침입으로 국토는 극도로 황폐되고, 민중은 도탄에 빠졌으며, 또 문화재는 거의 소실되었다. 대구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과 속장경의 판목이 불타 버리고, 신라 시대 이래의 국보였던 황룡사 9층탑이 소실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한편, 최우와, 그 뒤를 이은 최항이 죽고, 항의 아들 최의가 정권을 물려받았으나, 유경과 김준에게 피살되어, 60여 년간 계속된 최씨 세력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고려 정부는 몽고에 강화를 청한 다음 원종 때(1270) 개경으로 환도하니, 이로써 고려의 39년간의 강화도 시대는 끝난 것이다.

개경 환도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군대의 일부는, 배중손의 지휘하에 진도를 근거지로 여⋅몽 연합군에게 저항하였으며,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하에 저항을 계속하다가 평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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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 순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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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성의 시련

고려가 원의 간섭하에 들어간 후에도, 고려 왕실의 존재는 원의 고려 통치에 필요하였으므로 그대로 존속되었으나, 지금까지 쌓아 온 고려 자신의 지배 체제는 무너지게 되었다.

원은, 고려가 강화한 후 먼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 군대를 징발하였다. 그리하여, 원의 홀돈과 고려의 김방경이 지휘하는 여⋅원 연합군을 조직하여 큐우슈우의 하카타까지 갔으나 폭풍으로 인하여 실패하였고, 이어 제2차의 원정도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몽고는 고종 말년에 철령 이북 땅을 직속령으로 하여,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원종 때에는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두었다. 또,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후에는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두고, 목마장을 두어 경영하였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때에 다시 찾았으나, 쌍성총관부는 공민왕이 탈환할 때까지 약 100년간 원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관제상으로는 원의 압력으로 고려 관제의 격을 낮추어, 중서 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 이, 예 2부를 합쳐 전리사, 호부는 판도사, 형부는 전법사, 병부는 군부사로 고쳤다. 또한, 왕이 자신을 가리켜 짐(朕)이라 하던 것을 고(孤)라 하고, 폐하를 전하로 고치는 등 용어상의 제한도 받았다.

그리고, 원이 일본 정벌을 위하여 개경에 설치하였던 정동행성은 그 뒤에도 존속하여 고려 내정을 간섭하는 동시에, 감찰 기관인 순마소를 두었으며, 또 군관인 다루가치를 배치하여 내정을 간섭하고 공물 징수를 감독하였다.

이 때, 그들이 고려에서 가져간 것은 금, 은, 포백, 인삼, 자기 등을 비롯하여 농산물, 약재, 해동청 등 여러 가지였다.

풍속의 변동

몽고의 지배하에서 양국의 귀족, 문인, 기술자, 상인 들이 자주 왕래하여, 고려 상류 사회에서는 몽고어가 유행하고, 또 몽고식 이름을 가지는 이들이 생겼는가 하면, 몽고식 의복이나 체두 변발의 풍속도 유행하였다.

한편, 몽고에서는 고려의 여자를 번번이 요구하였으므로 사회 문제가 일어났고, 또 조혼의 풍속까지 낳게 하였다. 몽고 세력의 침입으로 고려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각 방면에서 입은 타격과 손실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인의 민족 의식이 강하였으므로, 마침내 이 시기의 고난을 극복하고 민족 문화의 전통을 수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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