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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선 초기의 사상 조류

(1) 조선 초기의 사상 조류

성리학의 두 흐름

고려 말기의 신진 사대부들이 권문 세족을 비판하는 사상적 무기로 삼았던 성리학(주자학)은, 전통 유학과 불교, 도교의 말기적 폐단을 시정하여 향촌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 중소 지주층의 입장에서 재구성된 새로운 유교 철학이다.

그러나, 성리학은 부국 강병과 물질적 공리주의를 배격하고 의리와 도덕을 지나치게 숭상하며, 향촌 자치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성리학은 민족에 대한 자각이 강하고 부국 강병을 희구하는 일반 대중의 심리에는 맞지 않는 점이 있었다.

조선 왕조의 개창을 둘러싸고 성리학에 보다 충실하려는 일부 사대부들은 왕조 교체가 의리, 도덕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역성 혁명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향촌에 내려가 교육과 향촌 건설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영남을 중심으로 사림파를 형성, 16세기 이후로 사상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무인, 농병(農兵)과 연결되어 왕조 개창에 참여했던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내세우는 한편, 부국 강병과 중앙 집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여러 사상 조류들을 흡수하여 신축성 있는 사상 정책을 펴 나갔다. 이들을 훈구파라 한다.

태조, 태종 때에는 불교 사원과 도교 행사의 경제적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정도전과 권근은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두 사람은 성리학에만 치우치지 않고, 국가 건설의 한 수단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사림파의 학풍과는 성격을 달리하였다.

이렇게 해서 불교와 도교의 사회적 폐단이 많이 시정된 세종 때 이후로는, 성리학만을 크게 내세우지 않고, 한⋅당 유학을 비롯하여 중국 역대의 사상 조류를 폭넓게 받아들이고, 불교, 도교, 풍수 사상, 민간 신앙 등 우리 나라 역대의 사상 조류들에 대해서도 관대한 정책을 썼다.

이러한 사상 정책은 특히 세종, 세조에 의해서 주도되어 탄력 있고 개성이 강한 관학의 학풍을 이룩하였다. 관학의 학풍을 가진 학자들은 뒤에 훈구파라 하여, 사림파의 학자와 구별되었다. 훈구파는 관학과 집현전을 통해서 양성되어 수준 높은 15세기 문화를 창조하였고, 사림파는 사학(私學)을 통해서 양성되어 16세기 이후의 사상계를 성리학 중심으로 이끌어 갔다.

민족 신앙의 보급

불교 철학은 사물을 독립, 대립 관계로 보지 않고 포용, 융합 관계로 보며, 국가와 개인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종교 기능을 가지는 까닭에, 사회 통합과 사상 통합에 매우 유리하였다. 그리고, 불교는 유교처럼 중국을 존중하는 세계관이 없고, 민간 신앙과 쉽게 융합되어 이미 민족 신앙의 하나로 굳어져 있었다. 이것이, 불교를 비판하는 한편, 보호, 육성한 이유이다.

도교는 무(武)를 존중하고 하늘에 대한 제사를 중요시하여, 유교의 문약에 빠지고 사대에 치우치는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1) 유교의 제사 규범에 의하면, 중국의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할 수 있고, 중국과 사대 관계를 맺은 제후 국가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의 너무 잦았던 도교 행사를 줄여서 재정의 낭비를 없애면서도 도교 행사를 전적으로 폐지하지는 않았다.

특히, 소격서라는 관청을 두어 제천 행사(초제)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마니산의 초제가 가장 유명하였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했다는 전설이 깃들인 마니산에서의 초제는 도교 신앙이 민간 신앙과 연결되어 민족 의식을 높이는 기능을 가졌음을 뜻한다.

풍수 도참 사상도 오랜 전통을 가진 민족 신앙의 하나로서 조선 초기에 매우 중요시되었는데, 한양을 수도로 정한 것도 풍수 사상에 의해서 합리화된 것이었다.

이 밖에, 무격 신앙(샤아머니즘)과 산신 숭배, 부락제, 삼신 숭배 등도 오랜 전통을 가진 민족 신앙으로서 서민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신앙들은 비과학적 요소가 많았으나, 서민들은 이러한 신앙 생활을 통하여 자아 의식을 가지고 소박한 무용과 음악 등의 정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민간 신앙의 지나친 미신 행위를 막는 동시에, 종묘, 사직, 문묘, 성황, 명산, 대천 등의 제사 규범을 유교적으로 개편하여 신앙의 통일을 추진하는 한편, 민간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흡수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무당을 국가에서 채용하여. 국가의 각종 제사와 질병 치료에 이용하였고, 삼신 숭배를 국조 숭배로 흡수하여 구월산 삼성사에 제사하는 동시에, 평양에 단군 사당을 따로 건립하여 제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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