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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쟁의 격화와 탕평책

당쟁의 격화

17세기 초에 두 차례의 호란으로 파괴된 국방력을 강화하고, 피폐된 민생을 회복시키려는 조처들이 잇달아 시행되어, 18세기 중엽에는 어느 정도 중흥의 기운이 돌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의 복구 사업은 미봉적인 수준에서 머물렀을 뿐, 근본적인 혁신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당쟁이 어느 때보다도 격화되어, 국가 정책을 당리, 당략에 이용하는 폐단 때문이었다.

인조 반정 이후로 실권을 장악한 서인은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의 명분을 내세워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의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실제로 서인 정권의 군사 기반을 제공하는 사병적 기능을 가졌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숭명 반청 의식이 강한 서인의 사류들을 등용하여 북벌을 실현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고, 증강된 군비는 서인의 군사적 기반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다음 현종은 서인 세력이 너무 증대하자, 서인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허적, 허목, 윤휴 등 남인을 등용하였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장악한 군권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북벌 운동의 무모성을 비판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예송 논쟁을 일으켜서 서인들과 정치적 대립을 폈다.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도 처음에는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서 남인을 우대하였는데, 남인이 병권을 강화하자 남인을 내몰고 서인을 등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서인이 집권하자,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영수로 하는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전자는 성리학을 강력히 옹호하면서 숭명 반청책을 지지하였고, 후자는 남인과 마찬가지로 성리학과 대외 정책에 탄력성을 가지면서 내정 개혁에 치중하는 경향을 띠었다.

그 후, 숙종 때부터 당쟁은 장희빈의 소생을 둘러싼 세자 책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전개되었다. 권력의 기반으로서의 병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세자 책봉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탕평책

경종이 숙종의 뒤를 이으면서, 노론이 세력을 잃고 소론이 일시 득세하였다. 그러나,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하고, 노론의 지지를 받던 영조가 즉위하였다.

영조는 당쟁에 의해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노론, 소론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인좌가 중심이 된 소론과 남인의 급진 세력이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켜 청주 지방을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소론을 몰아 내고 노론을 중용하였다. 그리하여, 영조의 치세에는 노론이 오랫동안 득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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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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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당인들이 장악한 병권을 병조에 귀속시키고, 서원을 정리하였으며, 속오례의, 속대전, 속병장도설, 무원록 등을 편찬하여 흐트러진 문물을 재정비하였다. 또한,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균역 제도를 시정하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로써 왕권이 크게 신장되고 관료 정치가 정비되어, 민생 안정과 부국 강병에 기여하게 되었다.

정조는 영조의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 발전시켜 여러 가지 치적을 남겼다. 규장각을 설치하고 정약용 등 신진의 인재들을 등용하여 학술을 장려하였으며, 장용영(壯勇營)이라는 친위 부대를 설치하여 왕권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였다.

한편, 문헌 편찬 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대전통편, 동문휘고, 무예도보통지, 규장전운, 전운옥편, 동국문헌비고, 추관지, 탁지지 등이 편찬되었다. 이로써 왕조의 통치 체제는 한층 더 정비되고, 15세기에 비견되는 문화의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조의 뒤에는 순조, 헌종, 철종 등 나이 어린 왕이 잇달아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의 실권은 대비와 연결된 노론파 외척에게 돌아가 변칙적인 정치가 약 60년간 계속되었다. 이 변칙적인 노론파의 정치를 유교적 관료 정치와 구별하여 세도 정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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