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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Ⅳ. 근대 사회
  • 1. 민족적 각성과 근대 문화의 수용
  • (2) 개화⋅척사 운동

(2) 개화⋅척사 운동

개항

1876년에 조선은 마침내, 오랫동안 지켜 오던 쇄국 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침략적인 의도로 나선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것은 제국주의의 길을 터 준 결과가 되어, 이후부터 우리 국가와 민족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미국 등으로부터 당한 전례를 모방하여 조선에 와서 운요오 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어 군함과 군인을 강화도에 보내어 조약 체결을 강요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 때, 정계는 아직도 개항 반대론이 거세었으나,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새로운 개화 세력이 형성되어 국내적으로도 문호 개방의 움직임이 싹트고 있었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은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을 통하여 해국도지와 영환지략 같은 책을 구입하여 세계 정세를 국내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강화도 조약의 내용은, 조선과 일본이 서로 동등한 자주국으로 사절을 교환하고, 조선이 부산과 그 밖의 두 항구를 개항하며, 조선에 거류할 일본인의 치외 법권(治外法權)을 인정하며, 일본이 조선 연해의 측량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것 등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한 것은, 종주 관계를 내세우는 청의 간섭을 끊으려는 의도를 내포한 것이었다. 그리고, 개항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쓰시마 섬을 통하여 교역하던 부산 외에 인천과 원산의 두 항구1) 인천은 서울의 문호이므로 정부에서 개항을 반대하였으나, 일본은 경제적 목적보다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고집하였고, 원산은 러시아의 남침에 맞설 군항으로 삼으려고 개항을 요구하였다.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이제까지의 통상 교역의 경제적 목적을 넘어 그들의 정치적, 군사적 침략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조약 체결에 따라 조선은 김기수를 제1차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보냈고, 일본은 서울에 그들 공사관을 설립하여 침략의 발판을 삼았다.

그 뒤, 미국과 수교 통상 조약을 맺고 서구 열강에게도 차례로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 중, 가장 먼저 조약을 맺은 미국과는 그 쪽에서 조약 체결을 서둘러 교섭을 벌이다가 일본에게 알선을 요청하였으나, 타국의 등장을 꺼리는 일본이 이를 거절하였으므로 청에게 청원하게 되었다. 청은 일본 세력의 독점적 조선 침투를 견제하려고, 조선 정부에 미국과의 교섭을 권고하여 조약 체결에까지 이르렀다. 이 무렵은 극동 정세와 조선의 당면 외교 정책 등을 논술한 황준헌의 조선 책략 등이 들어와 지식층에서 읽혀져, 차차 미국과의 교섭의 필요함을 느끼고 있던 때였다.

미국과의 조약에는, 나라가 어려울 때 반드시 서로 돕고 문화를 교류한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었다. 그 뒤,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 통상 조약을 맺었고2) 이 중, 영국과는 치외 법권의 인정 문제로, 프랑스와는 크리스트 교의 전교 활동 문제로 교섭에 곡절이 있었고, 러시아와는 이웃 청과 일본이 꺼려 외교 관계가 지연되었다., 다시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아크 등과도 외교 관계를 성립시켰다.

개화 운동

문호 개방 후 조선은 신문명과 근대 기술을 받아들여 개화 정치를 지향하였다. 김기수에 이어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돌아와, 일본의 발전상과 세계 정세를 알리고 개화를 적극 주장하였다. 이에, 정부는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게 하는 한편, 영선사(領選使) 김윤식으로 하여금 청년들을 거느리고 청에 건너가 톈진 조병창에서 근대 무기의 조련법을 익히게 하였다.

한편, 신문화의 수입 태세를 갖추기 위하여 청의 제도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아래 12사를 두어 국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또한, 군제를 개혁하여 재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정비하고,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새로 별기군을 만들고 일본인 교관을 채용하여 근대적 군대 훈련을 시키며, 사관 생도를 뽑아 간부를 양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개화 시책은 순탄하게 추진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개화의 추진 세력이 정계에 기반을 잡기 전에, 밖으로 문호 개방을 뒤쫓아 들어온 청과 일본 세력의 침투로 반일, 반청 감정이 일어나게 되었고, 안으로 민씨 일파와 대원군 간의 정쟁에 얽혀 척사론을 바탕으로 하는 개화 반대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이 일어나자, 청⋅일 양국은 조선에서의 독점적 세력을 구축하려고 각축을 벌였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은 부패한 민씨 세력들이 구식 군대를 차별 대우한 데서 발단하였다. 난군은 포도청을 부수고 민비의 일족을 숙청하였으며,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본 교련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나아가, 궁궐을 습격하여 민비까지 시해하려 하였으나, 민비는 충주로 피난하고, 대원군이 일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의 기회를 노리는 청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준 결과가 되어, 우창칭이 거느리는 청군이 출동하여 대원군을 청으로 압송하여 갔다. 그 결과, 민씨 일파가 다시 집권하고, 그 정권을 유지하려고 친청 사대 경향을 띠게 되었다.

청은 이 때부터 조선의 내정을 적극 간섭하였다. 즉, 묄렌도르프와 마졘창을 외교 고문으로 추천하여 외교, 세정을 감독하게 하고,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한 위안 스카이로 하여금 조선 군대를 청국식으로 훈련시키게 하였다. 이 무렵에, 청과 상민 수륙 무역 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맺어 청의 상권이 확대되었고, 또한 일본의 경제적 진출을 억제하고자 천슈탕을 보내어 상무와 광산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 틈을 타서, 난중에 쫓겨갔던 일본 공사 하나부사가 군함을 끌고 와, 조선 정부에 임오군란 때 일본 공사관을 습격한 책임을 추궁하고, 배상금을 지불할 것, 공사관 보호를 위하여 일본 군대의 주둔을 승낙할 것, 일본에 사절을 보내어 사과할 것 등을 규정하는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우정국 설치 축하연을 계기로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과 민씨 정권의 사대 경향에 반대하는 급진적인 개화당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대당이 노년층인 데 비하여, 이들은 패기에 찬 젊은이들이었다.

개화당은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급진적으로 근대적인 국민 국가에로의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일본 군대를 불러들여 왕을 옹위하고 민씨 일파의 사대당 인물을 많이 살상함으로써 일단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문벌 타파, 사민 평등, 재정의 단일화, 지조법(地租法)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 기구 개편 등 근대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대개혁을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후원을 약속하였던 일본의 배신과 위안 스카이의 간섭으로 정변은 실패로 돌아가고, 중요 인물들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니, 개화당의 정권은 3일 만에 무너지고, 이로 말미암아 청의 세력만 강화시킨 것이 되었다.

개화당의 14개조 개혁 요강

1. 청나라에 잡혀 간 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의 평등 권리를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에 따라 관리가 된다.

3.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에게 이롭게 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재능 있는 자는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현저한 자는 처벌한다.

6. 각 도의 상환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없앤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없앤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안의 의정소에 모여 모든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정부, 육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요컨대, 개화당의 표방은 근대적이었으나, 구태 의연한 정변 방식만으로 정권의 장악과 개화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큼, 개화당은 전근대적인 정치 체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밖으로는 조선에 들어온 청과 일본의 침략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안으로는 그들 자신의 세력을 성립시킬 수 있는 근대적인 기반이 어떤 성격의 것이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였으므로, 일본에 이용만 당하고 만 셈이었다.

갑신정변 후 일본은 불리한 세력을 만회하려고 조선에 한성 조약을 강요하고, 이어 청과 톈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다시 청과의 세력 각축을 꾀하였다. 톈진 조약에 의하여 양군은 철수하였으나, 청은 위안 스카이를 통상 사무 전권 위원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조선 내정을 간섭하였다.

척사 운동

문호 개방 이후 갑신정변을 겪기까지, 조선 정계의 일각에서는 재래의 전통 질서를 그대로 지키면서 자본주의적 외래 세력을 배척하는 존왕 양이(尊王攘夷)적 척사 운동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배일 사상을 고취하였다. 이 운동은 주로 보수적인 양반층과 이항로계의 유생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는데, 전국적으로 외세 의존적 개화주의를 크게 견제하였다.

일본과 수교 조약을 맺을 때, 최익현, 유인석을 비롯한 유생들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서양이나 다를 바 없는 오랑캐라고 하는 위정 척사론을 주장하면서, 해외 통상은 망국의 근본이라고까지 절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과 수교가 성립되면 천주교의 전파와 경제적 침략이 따를 것도 예견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다른 한 면에는 일본의 침략적 의도를 내다보고 있어, 민족과 주권을 지키려는 애국적인 자주 의식이 강렬하였다.

정부의 개화 시책을 비난한 것 중에는, 개항 이후 일본의 침략상을 열거하고 황준헌의 조선 책략을 축조 비판한 것도 있었다. 또, 일본과의 수교 통상을 계속하려면, 교환되는 사신, 내왕선의 수, 통상 품목과 통상 방식 등에까지 엄격한 제한을 가하게 하고, 수입되는 물품을 조사하여 일본 책이나 서양 책은 모두 색출하여 불태워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다. 이와 같은 것의 대표적인 예가 영남 유생 이만손 등의 만인소(萬人疏)와 홍재학 등의 척사론(斥邪論)이었다.

척사 운동은, 근본적으로는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전환하는 개화의 흐름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국민에게 자강 의식과 국가의 자주 의식을 굳게 하는 내수 정신(內修精神)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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