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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 민국의 성립

광복군의 항전

한국 민족의 해방과 독립의 계기는 연합국의 승리가 가져다 준 결과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일제 침략 이래 해방의 날까지 줄기차게 계속한 민족의 독립 투쟁의 결과라고 하겠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김구, 김규식, 김원봉, 지청천 등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항쟁하던 독립군과 중국 대륙에 흩어져 있던 한국 청년을 모아, 광복군과 조선 의용대를 편성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그 뒤, 임시 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더불어 충칭(重慶)으로 옮기면서, 정부 체제를 본토 수복을 위한 임전 태세로 정비하고 모든 무장 역량을 광복군으로 통합, 훈련하여 독립을 촉진하였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시키려고 외교적 노력을 펴는 한편, 임시 정부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 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광복군은 연합군과 합동하여 대일 항쟁을 수행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사이에 광복군에 관한 협정을 맺어 공동 훈련과 작전을 펴게 되었고, 일부의 광복군은 버어마 전선까지 파견되어 영국군과의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한민족의 군대는 마지막까지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항전을 계속 수행하였다.

민족의 해방

한국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소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란 망상을 안고 침략 전쟁에 나섰던 일본은, 원자탄의 공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하여 소련에게 항복의 알선을 청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도리어 연합군에 가담하여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북한으로 진주하여 왔다. 이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무조건 항복을 하여 연합군의 점령하에 들어가고, 한국 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 포츠담 선언에서 약속된 민족의 해방이 그대로 독립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연합군은 얄타 밀약으로 현재 우리 민족의 비극의 씨앗인 38도선의 군사 경계선을 합의하고, 그에 따라 남북한에 미군과 소군을 각기 진주시켰던 것이다. 그리고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제각기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런 속에서, 완전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의 의지는 쉽게 관철되지 못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의 외상 회의는 한국의 5개년 신탁 통치안을 결의하였던 것이다. 이 3국 외상 회의의 결과가 발표되자, 우리 민족은 분노하여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북한 공산주의자들까지도 반탁 운동에 참가하였으나, 소련의 사주를 받은 그들은 중도에 돌변하여 민족적 양심을 짓밟고 찬탁을 주장하여 국민을 실망하게 하였다.

그런데, 소련측은 찬탁을 주장하는 단체들만으로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에, 미⋅소 공동 위원회는 성과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외세의 작용이, 단합하여 통일 정부 수립에 매진해야 할 정계를 더욱 혼돈시키고, 민족 분열과 국토 분단의 비극을 몰고 왔던 것이다.

한편, 일본의 침략하에 민족 문화의 전통을 해체당하고 정치, 경제, 사회의 주도권을 상실당한 상태에서 형성된 식민지 체질의 탈피는 쉽지 않았다. 식민지 체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신 기반에서는 현대 사상 체계에 대한 바른 이해의 성립을 저해하는 요소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당시의 국제 관계를 파악하고 민족의 독립과 국가 운영의 의미를 바로 이해할 만한 국민적인 역량이 생겨 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정신적 빈곤은 사회와 정치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혼란에 빠졌고,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의 암살 사건 같은 것도 빚어 냈다.

대한 민국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미⋅영⋅중⋅소의 4개국 외상 회의에 넘겨 해결하기를 바랐으나, 소련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미국은 한국 민족의 독립 주장을 유우엔 총회에 반영시켰다.

미국의 제안은, 유우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설치하여 한국인의 민주적인 총선거를 감시하게 하여 통일 독립 정부를 수립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한국의 적화를 바라는 소련 블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대 다수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반대하여, 한국 임시 위원단이 북한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에, 유우엔은 소총회를 개최하여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국민의 독립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게 하자는 결의를 하였고, 그에 따라 1948년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의 결과, 제헌 국회가 구성되고, 여기에서 3⋅1 독립 정신을 계승하는 민주 헌법을 제정하여, 그 해 7월 17일에 공포하였다. 이어, 제헌 의회 의장인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행정부를 구성하고, 8월 15일, 대한 민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대한 민국 정부는 그 해 파리에서 개최된 유우엔 총회에서 48대 6이란 다수로, 한국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공인받고, 자유 우방 50여 개 국의 승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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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경축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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