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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한 민국의 정통성
  • (2) 6⋅25 사변의 민족 시련

(2) 6⋅25 사변의 민족 시련

북한의 공산화

대한 민국이 수립된 이후 정부가 당면한 문제들은 복잡 다단하였다. 안으로는 전쟁 이후 혼란된 사회를 안정시키고 극도로 악화된 경제를 개선해야 했으며, 밖으로는 공산화된 북한의 침략 기도를 분쇄해야 하였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대한 민국의 이와 같은 헛점을 내다보면서, 김일성을 우두머리로 하는 소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만들고, 북한 땅에 공산 독재를 시행할 뿐만 아니라, 대한 민국의 교란을 시도해 왔다. 그들은 소련에서 군원을 받아 급속히 군사력을 강화하여, 6⋅25 사변 직전까지에는 20여 만의 중무장한 군대를 편성하는 한편, 남한의 공산주의자를 사주하여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여수, 순천에서의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민족 시련의 극복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 공산군은 소련과 중공의 후원 아래 일제히 남침을 개시하여 민족 상잔의 비극을 야기시켰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국군은 수류탄을 가슴에 안고 적의 탱크에 돌격하여 격파시키는 등의 용전을 벌였으나,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부득이 후퇴를 거듭하여 대구 북방에 저항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한편, 공산군의 침략이 개시되자, 유우엔은 안전 보장 이사회를 개최하여 공산군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그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유우엔 군의 출동을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등 16개국이 유우엔 군의 이름으로 참전하여 국군과 합동 작전을 전개하였다.

국군과 유우엔 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고비로 서울을 탈환하고, 원한의 38도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수복한 후 북진을 계속하여, 그 선발대는 압록강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투는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아군은 공산군의 공격에 의하여 한때 한강 선 이남까지 후퇴하였으나, 그들에게 손해를 입히며 38도선 이북으로 물리쳤다. 그 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이 시기에 소련이 휴전을 제의하여,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 때, 한국민은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휴전 반대 운동을 일으켰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남으로써, 통일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민족 상잔의 비애만 절감되었다. 사변 중 입은 피해는 막심하여, 그 사상자는 약 100만 명에 이르렀고, 국토는 초토화되었으며, 모든 산업 시설은 파괴되었다. 이와 같은 큰 희생을 치르고도 남북 통일의 큰 과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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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사변 중 파괴된 대동강 철교
6⋅25 사변 중 파괴된 대동강 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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