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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와 농민

장원 중에는 큰 것도 있었으나, 대개는 한 마을로 된 것들이었다. 그것의 중심에는 영주나 그의 대리자가 사는 영주관과 교회가 있었고, 그 곁에 농민의 오두막집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영주 직영지와 농민 보유지로 구성된 경작지와 농민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목초지 및 임야 등이 있었다. 그 곳에 사는 농민의 대부분은 농노였다. 그들은 영주에게 부역과 공납을 바쳐야 하였으며, 이전의 자유가 없고, 사망세와 결혼세를 물어야 하는 등 신분적 속박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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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의 모형
장원의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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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노는 로마 말기의 콜로누스의 자손들이거나 게르만의 자유민으로서, 오랜 혼란 속에서 토지를 잃거나 토지를 유력자에게 바쳐 그 보호 아래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속적 신분이었으나, 고대의 노예와는 달리 결혼하고 일가를 이루어 자기 수입으로 자유로이 살아나갈 수 있었으며, 토지의 상속권 등의 권리도 보장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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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하는 중세 농민
수확하는 중세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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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지는 2분 또는 3분 하여 해마다 하나씩 휴경하였으며(2포제와 3포제), 영주 직영지와 농민의 보유지들은 울타리가 아니라 좁은 골로 갈라 놓았을 뿐이었는데(개방 경작제), 이것은 보유지의 공평한 배분과 공동 경작을 위한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동 작업이나 공유지의 관리 등은 농민의 합의로 이루어졌으며,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관습대로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렇듯 중세 농촌은 전통의 힘과 전체의 규제가 강한 공동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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