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3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세계사(3차)
  • Ⅵ. 현대 세계와 우리
  • 1. 현대 세계의 시련
  • (2) 베르사이유 체제와 민족 운동의 전개
  • 평화의 모색

평화의 모색

전례 없는 대규모의 전쟁을 치르고 난 사람들의 가슴은 평화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하여,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최초의 국제 기구로서 국제 연맹이 탄생하였다. 국제 연맹은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사회 복지면이나 문화면에는 공헌하였다. 그러나, 침략을 방지할 구체적인 안전 보장책이 마련되지 않고, 제창한 나라인 미국이 참가하지 않았으며, 독일과 소련도 처음에는 참가가 허락되지 않아 평화 유지에는 결함이 많았다.

확대보기
국제 연맹
국제 연맹
팝업창 닫기

평화 수립에 있어 참전국 상호간의 적대 감정의 해소는 매우 중요하였다. 1925년 독일을 포함한 주요 국가들이 로카르노 협정을 맺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준수와 평화로운 문제 해결을 약속하여, 다음 해에 독일이 국제 연맹에 가입하였다. 이어 1928년에는 프랑스와 미국이 주가 되어 부전 조약으로 알려진 켈로그⋅브리앙 조약이 체결되었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참가한 이 조약은 전쟁을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었으나, 이를 어겼을 때의 제재 방법이 들어 있지 않았다.

평화 수립에 있어 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는 독일의 배상금 문제와 군비 축소 문제였다. 막대한 배상금이 부과된 독일은 패전의 혼란 속에서 이를 지불하지 못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23년 프랑스가 루우르 공업 지대를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전승국에 대한 채권국이 된 미국이 주가 되어 도오즈 안(1924)과 다시 영 안(1929)을 마련하여 배상금을 대폭 감소하고, 합리적인 지불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 뒤 세계적인 공황이 발생하자, 관계국은 로잔 회의를 열어 독일의 배상금을 실질적으로 면제하였다(1932).

군비 축소는 평화 유지와 직접 관련되는 문제였고, 따라서 1921~1922년의 워싱턴 회의를 필두로 제네바(1927), 런던(1930), 그리고 다시 제네바(1932)에서 이 문제에 관한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력함의 보유 비율이, 그리고 런던 회의에서 미국, 영국, 일본의 보조함의 보유 비율이 결정되었을 뿐으로, 군비 축소의 전반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1932년의 제네바 회의는 국제 연맹이 주관한 세계적인 규모의 회의였으나, 아무런 결정도 짓지 못한 가운데 독일에서는 재무장을 주장하는 나찌 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군비 축소 문제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