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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서남 아시아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인도에서는 대전 전부터 스와라지 운동으로 알려진 자치를 요구하는 민족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대전 중 인도는 영국의 요청에 의하여 병력과 물자를 공급하여 영국을 지원하고, 그 댓가로 자치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대전이 끝난 뒤, 영국은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자치와 나아가서 독립을 요구하는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게 되었다.

인도에는 힌두 교도 이외에 상당수의 이슬람 교도가 있었다. 전자는 인도 국민 회의파를, 후자는 전 인도 회교도 연맹을 결성하여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대전 직후에는 양자가 자조 협력을 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단합을 하지 못하고 서로 분리되는 경향이 강하였다. 대전 후에 인도의 민족 운동을 주도한 것은 힌두 교도 출신인 간디였다. 그는 ‘비폭력, 비협력’을 내걸고, 영국 상품의 불매 운동과 그의 유명한 물레가 상징하듯이 전근대적인 인도 제품의 사용 권장 등의 방법으로 영국의 지배에 도전하였고, 지방에서는 지방대로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으로부터 조금씩 양보를 획득한 결과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거의 자치령에 가까운 지위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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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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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는 1차 대전으로 그 영토가 소 아시아로 축소되고, 그리이스의 침공과 연합국에 의하여 그나마 영토가 더 줄어들 위험에 당면하였다. 이에 케말 파샤를 지도자로 하여 대전 전의 청년 투르크 당의 개혁을 더욱 확대시킨 혁신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그리이스의 침략을 물리치고, 연합국과는 로잔 회의(1923)에서 유리한 조약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케말 파샤의 영도하에 낡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무너지고, 터어키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일당 지배 체제였지만,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를 본받은 헌법이 채택되고,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허용되었다. 케말 파샤는 수도를 앙카라로 옮기고 대대적인 근대화 작업에 나섰다. 즉, 종교를 국가로부터 분리시켜 종교적 차별을 없애고, 아라비아 문자 대신 알파베트를 도입하며, 또 이슬람 법 대신 서 유럽식의 법률을 도입하였을 뿐 아니라, 재래의 전통적인 복장까지 개혁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름에 성을 붙이도록 하고, 스스로는 ‘아타투르크(투르크족의 아버지라는 뜻)’라 칭하였다. 이러한 혁명적인 근대화 작업을 통하여 터어키는 근대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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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말 파샤
케말 파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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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를 벗어나 1922년에 독립하고, 페르시아도 러시아와 영국의 세력을 벗어나 1925년 새 왕조를 세우고 근대화에 노력하는 한편 국명을 이란으로 바꾸었다(1935). 이라크는 1932년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고, 아라비아도 사우디 아라비아의 이름으로 통일되었다(1927).

그러나, 이러한 아랍 국가들의 근대화는 미완성인 경우가 많았고, 풍부한 석유 산출로 유럽 열강의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어 있어, 아랍 민족주의의 물결은 가시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팔레스티나를 위임 통치하면서 유대 인의 귀환 운동을 지원하여, 유대 인의 민족주의와 아랍 민족주의의 분쟁의 씨를 뿌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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