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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4차(상)
  • Ⅰ. 고대 사회의 발전
  • 2. 삼국의 성립과 발전
  • (1) 삼국의 성립

(1) 삼국의 성립

삼국 시대의 국가

삼국은 그 초기에 발전한 철기 문화의 기반 위에서 각 지방의 부족장 세력들을 통합하면서 성립되었다. 삼국이 성립되던 시기의 사회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삼국 초기의 지배 세력이었던 강한 부족장이 우세한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노비와 일반 민중을 더욱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각 지방의 지배 세력들이 왕권에 복속하는 대신, 지배자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전 지배 계층이 결속할 수 있는 정치 제도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중앙의 관리나 군대가 지방에 파견되어 점차 지방 지배를 확실히 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대 왕국의 성립과 발전이 중국보다 늦었다. 그것은, 고대 왕국으로 성장하려던 고조선이 한족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그 후 한의 분열 정책으로 각 부족의 통일 세력의 성립이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한의 분열 정책과 그 침입 세력에 대처해 나가면서 고대 왕국을 성립시켜 나가게 되었다.

삼국 시대의 국가는 강력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중국의 세력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시켜 나갔다.

고구려의 성장

고구려는 이미 태조왕 때부터 고대 왕국으로서의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 뒤 3세기 동천왕 때에는, 중국에서는 후한이 망하고, 위, 촉, 오의 삼국이 대립하고 있던 시대로서, 오는 요동 지방의 실권자인 공손 연과 통교하여 위를 견제하였고, 고구려는 이러한 오와 교류하였다.

한 군현을 상대로 싸우던 고구려는, 이 때부터 국제 관계의 변화에 대처하여, 위, 촉, 오의 대립 관계를 이용하면서 발전하였다.

고구려는 3세기 중엽에, 중국과 낙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위장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수도까지 함락된 일도 있었다.

그 뒤, 중국에서는 북방 민족들이 만리 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대하여 적극 공세를 취하게 되면서 진(晉)의 세력이 약화되고, 5호 16국, 동진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미천왕은 서안평을 점령하고, 낙랑을 공략하여 고조선 시대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그 뒤에도 고구려는 영토 확장 사업을 계속 벌여, 서쪽으로는 요하,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대륙의 침략 세력을 막아 주는 민족의 방파제로서의 몫을 하게 되었다.

백제의 발전

고조선이 망할 무렵, 한강 유역에 북쪽에서 많은 이주민이 들어왔다. 여기에 고구려의 한 갈래인 위례 부락이 점차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것이 백제이다.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르러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통합하였다.

이와 아울러 백제의 국력이 크게 성장하여, 근초고왕 때에는 북으로는 고구려와 싸우는 한편, 남으로는 마한의 나머지 땅을 병합하여 그 세력이 전라도 남해안까지 미쳤고, 탐라국까지 복속시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백제는 그 국력을 크게 뻗쳐, 4세기 중엽에 중국에서 진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요서 지방을 점령하고, 이어서 우세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산뚱 지방과 일본의 여러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이처럼 백제인은 요서, 산뚱, 일본 지방, 그리고 본국을 연결하는 활동 무대를 확보하여 활발하게 해외 진출을 하였다.

신라의 성립

고조선의 멸망 이후, 경주 평야에서 일어난 나라가 사로였다.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부족이 연맹하여 왕인 이사금을 선출하였으며, 이들이 주체가 되어 사로 6촌이라는 6부족이 연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내물왕 때부터 김씨의 왕위 세습권이 확립되었고, 왕의 칭호도 왕권의 강화를 나타내는 대수장이란 뜻의 마립간이라 부르게 되었다.

내물왕 때에 왜구의 침입을 받게 되자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원군이 이를 물리쳐 주어, 한때 고구려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고구려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고구려를 통하여 북중국과 교통하면서 중국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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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금관
신라의 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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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야

일찌기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였던 낙동강 하류 지방에는 철기 시대에 와서 6가야가 성립되었다. 고령의 대가야와 김해의 금관 가야가 주축이 된 가야 세력은 낙랑, 대방, 일본과 빈번히 교류하였다. 특히, 일본 지역에 진출하여 그 곳과 연결하는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고대 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백제와 신라에게 분할, 점령되고 말았다.

가야는 비록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으나, 고령, 창녕 등의 가야 고분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상당한 문화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가야 문화는 신라의 문화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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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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