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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고대 사회의 발전
  • 3. 삼국 시대의 사회와 문화
  • (2) 삼국 시대의 문화

(2) 삼국 시대의 문화

원시 종교와 불교의 수용

삼국 시대에 들어와서도, 민간에서는 천신, 일월신, 산신, 해신 등 여러 신을 모시는 샤아머니즘이나 점술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사회는 이미 폐쇄된 씨족 사회의 범위를 벗어나, 초부족적인 상태로 변하였으므로, 씨족 사회 당시에 성립되었던 원시 종교를 가지고서는 확대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등 종교인 불교가 이에 대신하여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불교는 삼국의 고대 왕국의 체제가 정비될 무렵에 전래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백제는 침류왕 때 전래되었다. 그리고, 신라에는 5세기 중엽에 전래되었으나, 법흥왕 때에 이르러 이차돈이 순교한 뒤부터 공인되었다.

당시의 불교는 종교로서의 구실과 함께 서역과 중국의 문화를 우리 나라에 전달하는 구실도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고대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깨닫게 하였다.

고구려 불교는 주로 대승 불교인 삼론종이 크게 발전하였고, 백제 불교는 주로 율종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겸익은 성왕 때 인도에서 율종 관계의 불경을 가지고 돌아와서 번역까지 하였다.

한편, 백제는 6세기 중엽에 일본에 불교를 전해 주었으며, 많은 승려를 보내 일본 불교의 기초를 닦아 주었다.

신라에서는 불교가 왕실과 결합해서 발전하였는데, 여러 왕이 불교식 이름을 가지기도 하였다. 진흥왕 때에는 고구려의 승려 혜량을 맞아 국통으로 삼고, 그 아래 주통, 군통을 두어 교단을 조직하였다. 그 뒤, 진평왕 때의 원광은 불교를 선교했을 뿐만 아니라, 세속 5계를 정하여 가르치는 등 새로운 사회 윤리와 국가 정신을 확립하기에 힘썼다.

한편, 도교도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 사회에 전래되어 있었는데, 고구려 보장왕 때 연개소문은 불교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도교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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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산수문전
백제의 산수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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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의 발달과 국사 편찬

삼국 시대에는 우수한 문화를 배경으로 한 중국의 한자와 그 문학이 들어와 있었으므로, 대부분 한자를 썼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삼국 시대의 지명이나 향가 등을 보면 한자의 뜻과 음을 따서 만든 이두로써 우리말을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식의 기록은 삼국 시대에 널리 행해졌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하였고, 태학을 세워(372) 한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지식층에서는 경서와 역사서가 읽혀졌다. 또, 각처에 경당을 세워 청소년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현재 전하는 당시의 한문으로는 통구에 있는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과 중원 고구려비의 비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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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고구려비
중원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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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서도 일찍부터 한학이 발달하여, 5경 박사와 의박사, 역박사가 있었으며, 한학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백제의 한문으로서는 위서에 실려 있는 것으로 개로왕 때 북위에 보낸 국서가 있으며, 세련된 문장 속에 노장 사상이 나타나 있는 사택 지적비의 비문이 있다.

신라의 한문으로 주목되는 것으로는 진흥왕 때 세운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의 비문이 있다. 진평왕 이후부터는 신라에서도 유학이 널리 연구되었다. 임신 서기석에는 신라의 청년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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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서기석(탑본)
임신 서기석(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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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삼국 시대에 들어와서는 유학의 연구를 비롯하여 역학, 의학 등 고대 과학 연구가 활발하였고, 공예, 건축 등 기술 부문에서도 상당한 발달을 보였다. 건축에는 기하학 원리를 응용하였고, 역학에는 수학을 응용하였다.

한편, 삼국의 정치⋅사회적 발전과 한학의 발달은 국사의 편찬 사업을 일으키게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역사가 편찬되어 이미 유기가 있었는데, 이것을 영양왕 때 태학 박사 이문진이 간추려 신집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에 박사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에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삼국 예술의 성격

민간에서는 설화나 노래, 그리고 음악 등에 그들의 전통적인 성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배층 사회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보다 세련되고 다채로운 귀족 예술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불교 예술로서, 사원의 건축과 불상의 조각이 활발하였으며, 음악에 있어서도 화려한 면이 새로 가미되었다.

그리하여,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신라 토기와 같이 전통적인 소박한 체질을 그대로 담고 있는 미술품이 있는가 하면,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과 같이 세련미가 뛰어난 미술품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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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
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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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미륵보살 반가상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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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예술은 각각 그 특징이 있었다. 고구려 예술품은 힘과 정열이 넘치고 있다. 예를 들면, 무용총의 수렵도를 비롯한 벽화나 그 밖의 공예품들을 보면 힘찬 기상이 사실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백제의 예술품은 우아하고 미의식이 가장 세련되어 있다.

또, 신라 예술품은 소박한 옛 전통이 남아 있었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은 삼국 시대 말기에 와서는 엄격하면서도 조화미가 넘치는 모습이 나타났다.

고구려 미술

고구려의 고분은 석총과 토총이 있는데, 토총에는 그 내부에 벽화가 있다. 초기에는 주로 석총이 만들어졌으나, 점차 토총이 주류를 이루었다.

석총으로는 장군총이 유명한데, 그 전방에 광개토 대왕릉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광개토 대왕의 능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장군총은 계단식으로 화강암을 7층으로 쌓아올렸는데, 맨 아래층은 길이가 약 30m이고, 높이는 약 13m이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서 각 층의 넓이와 높이를 줄여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토총은 흙으로 덮은 봉토 내부에 횡혈식 석실이 있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의 하나는 강서 고분이다. 이 석실에 그려진 사신도는 고구려 벽화 중에서도 매우 우수한 것으로, 흑, 백, 청, 주홍, 갈색 등의 색깔이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힘과 패기가 넘쳐흐르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도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사신도 외에, 그 당시의 생활 풍속이나 가옥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있고, 수렵이나 전쟁의 모습을 그린 것도 있다. 이러한 벽화들 중에는 서역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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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도(쌍영총)〈좌〉와 수렵도(무용총)〈우〉
기사도(쌍영총)〈좌〉와 수렵도(무용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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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불상은 중국 북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다른 미술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은 그 표현에 있어서 고구려의 특색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선돌 형태의 비석에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록하였는데, 그 한문 글씨체는 기운차고 독특하다.

백제 미술

백제의 유물, 유적은 많이 파괴되었으나, 금동불, 석불, 석탑 등 불교 관계의 유물을 비롯하여, 고분 안에 그린 벽화와 기와, 문양전 등이 남아 있다.

서울 석촌동에 있는 백제 고분은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분이다. 웅진 시대의 공주 고분에는 횡혈식 석실 고분과 무녕왕릉 같은 전축분이 있는데, 이 전축분의 건축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웅진 시대의 고분은 아직 소박하고 고졸한 맛이 남아 있으나, 사비 시대에 와서는 귀족 미술이 크게 발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만들어진 능산리 횡혈식 석실 고분을 보면, 그 규모는 작으나 건축 기술과 벽화가 매우 세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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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녕왕릉 출토 지석
백제 무녕왕릉 출토 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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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석불 중 소박한 옷차림을 한 서산 마애 삼존불상은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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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마애 삼존불상
서산 마애 삼존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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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으로는, 목조탑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초기 형식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있고, 균형이 잡힌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것으로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사비성 시대의 백제 미술을 대표하고 있다.

신라 미술

신라의 미술은,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나, 뒤에는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제 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패기가 넘치고 조화된 아름다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수한 건축물로서는 분황사 석탑과 첨성대가 있으며, 백제의 아비지가 건축한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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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모전 석탑
분황사 모전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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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의 신라 고분 양식으로는 적석 목곽분, 옹관묘, 석실묘 등이 있는데, 규모가 큰 것은 대개 적석 목곽분이다. 한편, 이 고분들의 부장품으로 금관, 금팔찌, 금귀걸이, 유리 제품 등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로 보아, 일찍부터 금 세공 및 유리 제조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경주 황남동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와 여러 고분에서 나온 출토품들도 매우 세련된 솜씨를 보여 주고 있어, 신라 미술의 높은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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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단면도
천마총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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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와 음악

우리 나라 읍락 사회의 모습을 전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우리 민족이 노래를 즐겨 부르고 춤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예술적 재질은 중 국 음악과 불교 음악의 영향을 받아, 삼국 시대에 와서는 더욱 발달하였다. 삼국 시대의 노래로서는 신라의 향가가 대표적인데, 진평왕 때에 융천사가 지은 혜성가 등이 전하고 있다.

악기로는 고구려의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등 17종이 있었다. 고구려의 왕산악은 진의 7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100여 곡을 작곡하였으며, 뒤에 신라의 옥보고가 신라 음악에 맞는 30여 곡을 새로 지었다 한다.

대가야에는 가야금과 그 악곡이 있었는데, 우륵이 이를 신라에 전하였다. 이리하여, 신라에는 대⋅중⋅소 피리의 3죽과 거문고, 가야금, 비파의 3현이 있었다.

백제의 음악은 고구려와 비슷하였으며, 일본에 전해져서 일본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새로운 문물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간 우리 나라 사람들은 토착 사회의 일본인을 교화시켜 일본의 고대 문화를 형성, 발전시켜 주었다. 그 중에서도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가장 컸다. 백제의 아직기와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서 한문을 가르쳤는데, 이 때 한학은 일본인에게 문학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주었으며, 유교의 충효 사상도 보급시켜 주었다. 또, 불교, 불상, 경전과 5경 박사, 의박사, 역박사, 그리고 미술, 공예 기술자도 보냈다. 그 같은 영향으로 5층탑도 세워지고, 백제 가람이라는 건축 양식도 생기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도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의 승려 혜자는 일본 쇼오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담징은 유교의 5경과 그림을 가르쳤으며,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까지 전해 주었다. 일본의 자랑거리인 호오류우 사의 금당 벽화도 담징의 그림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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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류우 사 금당 벽화
호오류우 사 금당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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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현재 일본 각지에 남아 있는 불상은 그 형태미나 특징으로 보아 거의가 삼국의 불상이 전해진 것이다.

신라에서는 축제술과 조선술을 일본에 전하였으며, 특히 축제술이 전파되어 한인의 연못이라는 이름까지 생기게 하였다.

이 밖에, 삼국의 음악도 전해져 고구려악, 백제악, 신라악 등의 이름까지 생기게 되었으며, 일본 음악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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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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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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