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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고대 사회의 발전
  •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 (2) 발해의 건국과 발전

(2) 발해의 건국과 발전

발해의 건국

고구려가 망한 뒤에도 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이 당에 대한 저항 운동을 계속하였다. 조양에 있던 거란인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구려인 대조영은 일족을 이끌고 길림성(지린성, 吉林省) 돈화현 동모산에 와서, 고구려인과 말갈족을 합하여 국가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震)으로 하였다가(698), 뒤에 발해로 고쳤다. 발해는 옛 고구려의 유민이 지배 계층을 이루고 다수의 말갈족을 지배하였다.

발해는 중국 북쪽에 있는 돌궐과 연결하여 당의 세력을 견제하면서 안으로 말갈족의 통합에 힘써, 곧 옛 고구려 땅의 대부분과 지금의 연해주 지방에 걸치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정치 조직의 정비

발해의 관제는 중국의 3성 6부를 본떠서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성을 두고, 그 아래에 충부(이부), 인부(호부), 의부(예부), 지부(병부), 예부(형부), 신부(공부)의 6부를 두었다. 이와 같은 제도는 당의 제도를 모방한 듯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많아서 발해의 특색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발해의 정치 체제는,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 아래에 선조성의 장관인 좌상은 충부, 인부, 의부를, 중대성의 장관인 우상은 지부, 예부, 신부를 감독하는 2원적인 체제를 이루었다.

그리고, 국가의 중대사는 귀족들이 정당성에 모여 회의를 열어 결정하였으므로, 국사를 의논하는 곳이란 의미에서 그 최고의 관청을 정당성이라 한 것 같다. 또, 전국의 행정 구역은 5경 15부 62주로 나누었고, 군대는 8위로 조직하여 각 위마다 대장군과 장군을 두어 통솔하게 하였다.

발해 문화의 특성

발해의 서울인 상경(동경성)에서는 귀족 문화가 발달하여 만주 지역의 문화 중심지가 되어 말갈족을 크게 자극하였고, 또 관제를 정비하여 말갈족의 여러 부족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상경은 당의 서울인 장안 성(長安城)처럼 먼저 외성을 두르고, 국왕이 있는 궁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직선으로 뻗은 주작 대로라는 큰길을 내었으며, 그 좌우에 여러 갈래의 거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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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상경 성터
발해의 상경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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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지(上京址)에서 발견된 기와, 벽돌, 석등 등을 보면, 직선적이고 패기가 넘치던 고구려 미술이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면서도 웅장하고 건실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발해의 자기는 무게가 가볍고도 광택이 있는데, 당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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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기와
발해의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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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돌사자 머리
발해의 돌사자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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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와 당의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발해는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당으로부터 많은 서적을 수입하였으며, 9세기 초부터는 당에 유학생을 보냈다.

이들 가운데는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왔고, 외교 사신이나 승려들 중에는 한시에 능한 사람이 많았다.

발해의 대외 관계

발해의 세력은 8세기 초 무왕 때에 이르러 크게 떨쳤다. 이에 불안을 느낀 당은 송화강과 흑룡강의 합류 지역에 있던 흑수부라는 말갈족을 꾀어 발해와 대립하게 하였다.

이에, 무왕은 흑수부를 치는 동시에, 장문휴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산뚱 성의 떵조우를 공격하게 하였다. 당은 신라와 동맹하여 남, 서 양면으로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물러갔다.

이 사건 이후, 당은 신라가 차지한 대동강 이남 지역의 소유를 정식으로 인정하면서, 신라로 하여금 발해와 대립하게 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 뒤부터는 발해와 당과의 평화 관계가 다시 성립되어 무역이 빈번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모피, 삼, 말 등이었고, 수입품은 주로 직물, 책 등이었다.

한편, 발해는 바다 건너 일본과도 무역 관계를 맺어 동해의 해로를 개척하였는데, 이것은 신라에 대한 견제책의 의미도 지니는 것이었다.

발해사의 의의

발해는 220여 년 간 존속된 나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발해는 고구려가 망한 후 만주 지역을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로 유지시켰을 뿐 아니 라, 이 나라의 지배 세력이 고구려 유민이었고, 그 문화적 기반도 고구려의 것이 계속 유지되었다.

발해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신라와 대립 관계에 있었으나, 만주 지역에 대한 우리 민족의 지배권을 계속 확보하고 있었다. 뒷날 거란의 침입으로 망할 때에 고구려 계통의 상류층들은 고려에 흡수되어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지역을 거란족이 지배하게 된 후에도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의 옛 영토임을 내세워 회복하려는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었다. 고려 초의 북진 정책은 그 대표적인 것이며, 그 후 공민왕의 요동 정벌이나 고려 말기 또는 조선 초의 요동 수복 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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