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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고대 사회의 발전
  •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 (3) 신라의 학술과 불교 문화의 발달

(3) 신라의 학술과 불교 문화의 발달

통일 신라의 문화 기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새로 확대된 경제적, 사회적 기반 위에서, 각기 개성을 가지면서 발전되어 온 여⋅제 양국 문화를 통합하여 민족 문화의 토대를 확립시켰다. 그리고, 밖으로 당 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제 문화 조류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한층 더 세련된 문화로 발전시켰다.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문학, 과학, 예술의 각 분야에 걸친 상층 문화만 발달한 것이 아니라, 귀족 종교로 머물러 있던 불교가 일반 민간에게까지 널리 퍼져 국민 생활 전반을 자극함으로써 민간 문화의 수준도 한층 높아졌다.

한학과 기술학

통일 신라의 학술은 일반적인 한학과, 기술 분야인 의학, 병학, 역학, 산학, 율학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사회 생활을 실제로 이끌어 가는 학문의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한학에 있어서는, 통일 초의 문장가로서 강수를 들 수 있는데, 그는 특히 외교 문서 작성에 능하여 당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그 뒤의 설총은 경서에 조예가 깊었고, 한자의 뜻과 음을 따서 우리말을 기록하는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학 학습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신문왕 때에는 국학을 설립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학을 가르쳤다.

신라 말기에 들어와서, 학문 성적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자는 새로운 원칙을 세워서, 원성왕 때에 성적을 3품으로 구별하여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 출신과를 마련하였다. 이 제도는 골품 제도로 말미암아 제대로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학문을 보다 널리 보급시키는 데에는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한문학은, 통일 초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성덕왕 때에 김대문은 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등을 저술하였다. 이와 같이 자기 문화를 의식하게 되면서부터 중국의 것을 모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당에서 공부한 유학생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최치원, 김운경, 김가기 등이었다. 특히, 당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귀국한 최치원은 문란한 정치에 뜻을 잃고 은둔 생활을 하였으나, 그러한 생활 속에서도 훌륭한 저술과 문장을 남겼다. 그가 지은 계원필경과 비문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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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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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문학이나 유학 외에 천문, 수학, 역학, 의학, 병학 등의 기술학도 발달하였는데, 병학과 천문학에서는 김암이 조예가 깊었으며, 의학은 삼국 시대에 수입되었던 중국 의학이 더욱 발달하였다.

또, 목판 인쇄 기술도 발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 다라니경이다. 이것은 8세기 중엽에 인쇄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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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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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라 말기의 승려 도선은 중국에서 지리 도참설을 수입하였다. 이것은 인문 지리적인 인식과 예언적인 도참 신앙이 결부된 학설이었다. 이를테면, 송악이 나라의 서울이 될 만한 곳이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각 지방에 있어서도 그 지세에 따라 좋고 나쁜 곳이 있다고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 때까지 경주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이끌어지던 행정 조직을 고치고 국토를 재편성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까지 발전하여, 신라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향가 문학의 발전

한문학은 주로 귀족 사회에서 발달하였으나, 설화를 중심으로 한 불교 문학은 민간에도 퍼졌다. 그리고, 향가도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크게 발달하였는데, 승려나 화랑들 사이에서 많은 작품이 나왔다. 월명사와 충담사는 향가 작가로 유명하였고, 진성 여왕 때의 대구화상은 역대의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이란 향가집을 편찬하였다.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14수와 고려 초의 균여가 지은 11수를 합하여 25수뿐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다양하고 높은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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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
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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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문화의 발전

삼국 중 가장 뒤떨어졌던 신라 사회가 통일기에 들어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새로이 불교의 사상 체계를 성립시켰다. 원래, 우리 나라에는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가 뒤섞여 들어왔고, 대승 불교도 여러 종파로 나뉘어, 사상적 통일을 보기가 어려웠다. 더우기, 삼국 시대 초기의 불교는 토착 신앙을 포섭하면서 보급되었으므로, 뒷날까지 토착 신앙과 뒤섞인 샤아머니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통일 후 원효는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와 같은 명저를 남김으로써 불교를 이해하는 기준을 확립하였다. 또한, 정토종을 보급하여 불교를 대중화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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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삼매경론
금강삼매경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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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원효와 같은 시대의 고승인 의상은 신라 화엄종을 창설하였고, 원측은 당에 들어가 유식(唯識) 불교의 깊은 뜻을 깨달아, 현장의 사상을 계승한 규기와 대항하여 당의 서울에 있는 서명사에서 자기 학설을 강의하였다.

한편, 불교 연구를 위하여 인도에 가는 승려가 많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인 혜초는 당에서 바닷길로 인도에 들어가 각지를 두루 순례하고 돌아왔다. 이 때의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인도와 서역 지방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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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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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엽 이후, 귀족 문화의 발달이 절정에 이르러 그 생활이 사치스러워졌다. 이러한 경향은 말기로 내려오면서 점차 향락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이러한 퇴폐적인 것에 반발하는 은둔적인 사상 경향이 생겨, 도교와 노장 사상이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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