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4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4차(상)
  • Ⅱ. 중세 사회의 발전
  • 2. 귀족 사회의 발전과 변동
  • (3) 귀족 사회의 동요

(3) 귀족 사회의 동요

여진 관계의 변화

부족을 통일한 여진족은 12세기에 들어와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예종 때 요의 군대를 격파하고 독립하여, 국호를 금이라 하였다. 이 때, 송은 금과 연맹하여 요를 멸하였으나, 대신 금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금은 요를 멸한 뒤에, 고려에 대해서도 사대의 예를 취할 것을 요구해 왔다. 원래, 고구려 시대부터 우리 나라의 문화를 보급받아 성장해 온 여진족인 금에게 우리가 사대의 예를 취할 수 없다고 하여, 고려에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평화 유지라는 현실 문제 때문에 끝내 금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금과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금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아 금을 정벌하자는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고려 귀족 사회에서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족벌들이 세력을 잡았다. 족벌 중 대표적인 집안이었던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된 이래 80여 년 간이나 정권을 잡았다.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은 예종과 인종 때 거듭 외척이 되어 그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였다. 그는 금과의 관계에서 사대 정책을 주장하여 그의 세력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이에, 김부식 등은 군신의 구별을 엄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경계하였고, 한편 인종도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안 이자겸은, 척준경과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침입하여 궁궐을 불사르고, 인종을 가두고 독살하려고까지 하였다. 그 뒤,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지자, 왕은 척준경을 달래어 이자겸을 제거하였다(1127). 그리고, 얼마 후 척준경도 내쫓아 왕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고 인심이 불안해지자, 개경의 지덕이 쇠약해진 때문이라 하여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서울을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 때, 묘청 등은 서경 천도 계획을 적극 추진하여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기도 하였으나, 김부식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한편,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여론이 금에 대한 사대를 불쾌히 여기던 때라, 묘청 등은 북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 등은 금과 충돌하는 것은 송에 이용당하는 위험한 일이라 하여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대립이 계속되어 서경 천도가 불가능하게 되자, 묘청 등은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1135). 이 난은 1년간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김부식의 토벌로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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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궁 토성터
대화궁 토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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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은 귀족 사회 내의 족벌과 지역의 대립, 풍수설에 결부된 전통 사상과 보수적 유교 정치 사상과의 충돌, 금의 압력에 대한 반발 등 여러 원인이 얽혀 일어난 것이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귀족 사회의 폐단과 모순을 드러낸 것으로서, 난은 모두 수습되었으나, 그 근본적인 문제는 시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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