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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몽고의 침입과 항쟁

(2) 몽고의 침입과 항쟁

여⋅몽 관계

최씨 정권이 안정되어 갈 무렵, 북쪽의 금에서는 거란족이 다시 내란을 일으킨데다가, 칭기즈칸이 통일한 몽고 세력이 진출하여 만주 지역은 어수선하였다.

고종 초에 몽고에 쫓긴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하여 왔다. 이 때, 이들은 남쪽으로 들어오다가 제천 방면에서 김취려에게 대파되어 쫓겨갔고, 다음에 다시 침입하여 왔으나 고려 군대에 의해 북쪽으로 밀려 올라가다가 강동성에서 포위당하였다. 이 때, 고려는 북쪽에서 거란족을 추격하여 온 몽고 군대와, 두만강 지역에 있던 동진국(東眞國) 군대와 연합하여 강동성을 함락하였다. 이것이 고려와 몽고의 첫 접촉이었다.

몽고의 침입

몽고는 거란족을 토벌해 주었다는 구실로 고려에게 공물을 강요하였다. 그 뒤,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몽고 사신이 국경 지대에서 피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몽고의 장수 살리타가 군대를 이끌고 침입해 왔다(1231). 이 때, 고려는 일단 그들과 강화하고 돌려 보냈다.

강화를 맺은 몽고가 무리한 조공을 요구해 오자, 이에 고려는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고, 몽고에 저항 태세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몽고의 장수 살리타가 다시 침입하였으나, 처인성(용인)에서 고려 승려 김윤후에게 사살되고 몽고 군대는 쫓겨갔다(1232).

그 후, 몽고는 금을 멸한 뒤에도 자주 고려에 침입하여 왔는데, 그 때마다 우리 민족은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싸움은 장기전으로 들어가, 몽고의 침입을 60여 년 간이나 막아 내었다.

고려의 실권을 쥐고 있던 최씨 정권은 최우와 그 뒤를 이은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가 정권을 물려받았으나, 유경과 김준에게 피살되어, 60여 년 간 계속된 최씨 세력은 무너지고, 고려는 몽고에 강화를 청한 다음 원종 때 개경으로 환도하니, 이로써 39년 간의 강화도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1270).

개경 환도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대는 배중손의 지휘하에 진도를 근거지로 저항을 계속했으며,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하에 항쟁을 했으나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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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몽 순의비
삼별초의 항몽 순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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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성
용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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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내정 간섭

원은 고려와 강화한 후, 먼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강요하여 군대를 징발하였다. 그리하여, 원은 고려와 연합하여 큐우슈우의 하카타까지 갔으나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였고, 이어 제2차의 원정도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원은 이미 고종 말년에 철령 이북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하여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으며, 원종 때에는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두었다. 또, 삼별초의 항쟁을 꺾은 원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두었다. 그 후,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때에 다시 찾았고, 쌍성총관부는 공민왕이 탈환하였다.

한편, 고려의 관제는 원의 압력으로 격을 낮추어, 중서 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 이, 예 2부를 합쳐 전리사, 호부는 판도사, 형부는 전법사, 병부는 군부사로 고쳤다.

그리고,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하여 개경에 설치하였던 정동행성을 그 뒤에도 존속시키면서 감찰 기관인 순마소를 두었으며, 또 군관인 다루가치를 배치하였다.

이 때, 원이 고려에서 가져간 것은 금, 은, 포백, 삼, 자기 등을 비롯하여 농산물, 약재, 해동청 등 여러 가지였다.

풍속의 변동

양국 간에는 귀족, 문인, 기술자, 상인들이 자주 왕래하여, 고려 상류 사회에서는 몽고어가 유행하고, 또 몽고식 이름을 가지는 이들이 생겼는가 하면, 몽고식 의복이나 풍속도 유행하였다.

그리고, 몽고에서는 고려의 여자를 요구하였으므로 사회 문제가 일어났고, 또 조혼의 풍속까지 낳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고려의 문화가 몽고에 소개되고, 고려 풍속이 몽고의 상류 사회에 유행되기도 하였다.

몽고 세력의 침입으로 고려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입은 타격과 손실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인의 나라를 지키려는 정신이 강하였으므로, 마침내 이 시기의 고난을 극복하고 민족 문화의 전통을 수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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