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4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4차(상)
  • Ⅱ. 중세 사회의 발전
  • 3. 고려 후기의 사회와 문화
  • (3) 고려 말기의 정치와 사회

(3) 고려 말기의 정치와 사회

공민왕의 개혁 정책

원은 14세기 후반에 들어와, 각처에서 일어난 한족(漢族)의 반란으로 쇠약해져 갔다. 공민왕은 이 때를 이용하여, 친원 세력인 기철 등을 숙청하고 정동행성을 폐지하였으며, 쌍성총관부를 공략하여 영흥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그리고, 인당, 최영으로 하여금 요동 지방을 공략하게 하였고, 원의 간섭으로 바꾸어졌던 관제를 복구하는 한편, 몽고풍을 없애는 등 반원적인 자주 정책을 폈다.

원은 공민왕을 물러나게 하기 위하여 북서에서 침입해 왔으나, 최영이 이를 격파하였고, 또 원의 장수 나하추가 북동에서 침입해 오자, 이성계가 이를 물리쳤다.

이 즈음에, 공민왕은 요동 땅을 수복하기 위하여 지용수와 이성계로 하여금 북서, 북동 양면에서 북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황초령을 넘고 압록강을 건너 요양을 점령하고, 이 땅이 원래 우리 나라 땅임을 선포하였으나, 뒤에 명의 군대가 점령함에 따라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정치 세력의 성격

당시 국내에서는 권문 세가들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한편, 원의 세력과 결탁하여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수탈을 하여 민중을 도탄에 빠뜨렸다. 그러나, 신진 세력은 아직 나약하여 권문 세가와 대결할 만한 힘이 없었다.

공민왕이 반원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밖으로는 원의 세력과 싸워야 하고, 안으로는 권문 세가를 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원의 압력으로 왕권이 강화될 수 있는 기반이 약화되었으므로,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추진할 만한 중심 세력이 성립되지 못하여, 정치적 혼란만 거듭되었다.

홍건적과 왜구

원이 쇠약한 틈을 타서 일어난 홍건적이 공민왕 때 침입하여 서경을 점령하고, 그 후에 개경을 함락하였으나, 정세운, 안우 등이 대군을 동원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한편, 공민왕 때로부터 우왕 때에 걸쳐 왜구의 침략이 심하였다. 왜구들은 전국의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고, 살인, 방화, 약탈 등을 자행하였으며, 강화도에까지 침입하였다.

고려는 외교적 교섭으로 왜구의 창궐을 막아 보려 하였으나, 그것에 실패하자국방력을 강화하여 적극적으로 왜구 토벌에 나섰다. 토벌 작전은 전국 곳곳에서 이루어져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최영과 이성계는 왜구 토벌의 영웅으로서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이 때, 최무선은 중국 상인에게서 화약 제조 방법을 배워 화포를 만들어, 서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바다에서 크게 무찔렀다. 한편, 박위는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왜구의 기세를 꺾었다.

요동 정벌

왜구 토벌이 진행 중이던 우왕 말년에 고려와 명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났다. 명은, 원의 쌍성총관부 관할하에 있던 고려 땅을 그들의 직속령으로 만들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왔다. 이에, 고려는 크게 분개하여, 도리어 이 기회에 명이 차지한 요동 지방을 회복하여 옛날의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되찾으려고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요동 정벌을 둘러싸고 조정의 의논이 갈라졌다.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측은 즉각적인 출병을 주장하였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측은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요동 정벌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출병을 반대하였다. 결국, 최영의 주장대로 정벌군이 파견되었으나, 이성계 등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인 최영 등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등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는 중요한 계기를 잡게 되었으며, 명과의 관계를 호전시켜 나갔다.

확대보기
위화도 부근
위화도 부근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