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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근세 사회의 발전
  • 1. 조선 왕조의 성립과 발전
  • (3)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3)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명과의 관계

조선 왕조는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왕권과 국가 안전을 도모하는 등 전통적으로 우호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건국 초기에는 만주, 특히 요동 지방과 여진 문제 등으로 이해가 엇갈려 양국 사이의 관계가 거북한 때도 있었다.

요동 지방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땅으로, 동아시아 세력 판도를 가름하고 우리 민족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였으므로, 고려 이래 꾸준히 국토 수복 정책이 수행되어 왔다. 조선 초기에도 조직적인 요동 수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도전은 스스로 진법(陣法)을 만들어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북방으로 운반하였으며, 여진족을 회유하여 협조를 구하기도 하였다.

조선측의 이와 같은 의도를 일찍부터 알고 있던 명에서는 여러 가지 압력을 가해 왔다. 조선측은 적극적인 외교로 명의 의심을 무마시키면서 신축성 있게 대처해 나갔으나, 태조 때에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이에, 태종 때부터는 요동 수복 운동을 보류한 채 여진족에 대한 토벌과 북방 사민(徙民) 정책을 강화함으로써 대명 관계가 호전되었다. 그 후, 조선과 명은 선린 우호 관계를 도모하면서 문화 교류를 증진시켰다. 대명 외교는 실리 추구와 국토 확장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긴장이 계속되었으나, 후에는 점차 지나친 친명 정책으로 흐르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국토의 수복

여진족은 예부터 우리 문화의 보급과 자극으로 성장한 민족으로, 고려 시대에 금을 세워 중국의 일부를 지배한 일도 있었으나, 몽고족에게 패망한 뒤로는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만주 지방을 근거로 하여 부족 단위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통일 국가를 쉽게 이루지 못하고 조선과 명의 변경을 자주 침략하여 약탈하였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에는 많은 여진족 집단이 우리 민족과 가까이 살면서 자주 소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이러한 여진족을 몰아 내고 국토를 확장하려는 기본 목표 아래 화⋅전 양면 정책을 취하였다. 먼저,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여 관직, 토지, 주택 등을 주고 우리 나라 주민으로 동화시키는 동시에, 무역소와 상경 야인을 위한 북평관 등을 두어 국경 무역과 조공 무역을 허락하였다.

한편으로는 강경책을 써서 국경 지방에 많은 진보(鎭堡)를 설치하여 각 고을을 전략촌으로 바꾸어 방비를 강화하고, 때때로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세종 때에는 최윤덕, 이천, 김종서 등이 차례로 여진족을 토벌하여 4군과 6진을 설치하는 동시에, 북방 사민 정책을 활발히 실시하여, 마침내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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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과 6진
4군과 6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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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사민 정책은 태종 때부터 중종 때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수만의 남방 민호(民戶)를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토관(土官) 제도를 활용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등 국토 발전의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일본 및 동남 아시아와의 관계

고려 말에 자주 노략질을 하던 왜구는 점차 진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폐단이 남아 있었다.

조선 정부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수군을 강화하고 성능이 좋은 병선을 대량으로 건조하였으며, 화약 무기들을 개량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는 200여 척의 함대를 조직하여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고 돌아왔다. 이렇게 조선의 국력과 국방력이 급속히 커지고, 한편으로 일본 내의 남북조 혼란이 수습되면서 왜구의 침략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왜구의 침략이 줄어들면서 연해 지방이 다시 개간되어 경지 면적이 크게 늘게 되었다.

왜구를 뒤에서 조종하던 일본의 봉건 영주들은, 노략질이 어렵게 되자 교역을 간청해 왔다. 조선은 이를 계기로 이른바 교린 정책을 써서 제한된 조공 무역을 허락하였다.1) 3포 개항 이후 세종 25년(1443)에 계해약조를 맺어 쓰시마 도주에게 세사미두 200석, 세견선 50척으로 허용해 주었다. 중종 5년(1510)에 왜인들이 조선의 관용에도 불구하고 3포 왜란을 일으키자 3포를 폐쇄하였다. 그러나, 쓰시마 도주가 간청을 해 오므로 이를 받아들여 1512년 임신약조를 맺어 제포만을 개항시켜 주고 이전의 혜택을 반감했다. 중종 39년(1544) 사량진 왜변으로 일본 국왕의 사절을 제외한 왜인들의 왕래를 금하였다. 그 후, 명종 2년(1547) 정미약조를 맺어 엄격한 통제하에 통교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명종 10년(1555) 달량포의 을묘왜변으로 왜인의 왕래가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세견선이 왕래하였고, 세사미두를 받아 갔다.

부산포, 제포, 염포 등 3포가 교역 장소였는데, 쌀, 무명, 삼베, 삼, 서적, 공예품 등을 내주고, 황, 향료, 약재 등을 들여왔다. 이러한 양국 간의 교역은 일본측의 경제적, 문화적 욕구와 조선의 왜구 침입 방지를 위한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편, 조선 초기에는 류우큐우, 사이암, 자바 등 동남 아시아 각국에서도 사신과 토산물을 보내 오고, 조선의 문물을 수입해 갔다. 이리하여, 조선의 선진 문물들은 동아시아 및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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