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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훈민정음의 창제와 편찬 사업

훈민정음의 창제

우리 나라는 일찍부터 한자를 써 오면서 말과 글자의 다름에서 오는 불편을 덜기 위하여 이두 문자를 사용해 왔으나, 이것으로써는 우리말을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조선 초기에 와서 왕성한 민족적 자각과 전통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재정리하려는 작업과 아울러, 드디어 훈민정음의 창제라는 위대한 문화적 결실이 이루어졌다. 즉, 누구나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대중적인 글자를 가져야겠다는 세종의 민중애와 범국민적 욕구가 뭉쳐서 훈민정음을 만들어 내게 한 것이다.

세종은 일부 유학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집현전 학사들과 더불어 오랫동안 음운과 문자에 관한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훈민정음 창제에 성공하고, 세종 28년(1446)에 이를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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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해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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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배우기 쉽고 조직적이며, 어떠한 발음이든지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글자 제작의 원리나 그 형태가 매우 과학적이다. 또, 세계 문자 가운데서 비교적 늦게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가장 발전된 우수한 문자라는 점에서 세계 문자 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완성과 동시에 그 보급에 힘써서,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시가와 많은 서적을 번역, 출간하였고, 또한 서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을 배워 행정 실무에 이용하게 하고, 이들의 채용에 훈민정음의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이로써, 한문을 알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도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길이 트였을 뿐 아니라, 고유한 언어에 고유한 문자까지 가지게 됨으로써 민족 문화의 기반이 더 넓고 확고해졌다.

사서와 지리지

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각 방면의 학문이 발달하여, 민족적인 자아를 발견하고 전통 문화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의욕이 왕성하여 역사 편찬 사업이 활발해졌다.

건국 초기에는 왕조 개창을 정당화하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정착시키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으므로, 성리학적 대의 명분을 존중하는 역사 편찬이 시도되었다. 정도전의 고려국사와 권근의 동국사략은 바로 그러한 성격을 지닌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이 성장한 세종, 세조 때에는 성리학적 대의 명분보다는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고, 왕실과 국가 위신을 높이며, 문화를 향상시키는 방향에서 역사 편찬이 시도되었는데, 용비어천가 등은 그러한 방향에서 편찬된 책이다.

세종은 고려사를 자주적 입장에서 재정리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성리학적 사관을 가진 유신들과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오랜 진통을 거쳐 문종 때에 기전체로 된 고려사와 편년체로 된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다.

한편, 세조는 자주적인 통사(通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생전에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성종 때에 이르러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이 출간되었다.

또, 한 왕대의 역사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왕조 실록 편찬에도 큰 관심을 쏟았다. 실록은, 태종 때 태조 실록이 편찬된 이래로 역대 왕의 실록이 차례로 이루어졌는데, 날짜별로 그 날의 중요한 사건을 낱낱이 기록하였으므로, 조선 시대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의 문화 수준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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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실록
조선 왕조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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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집권과 국방의 강화를 위해서는 국토의 자연 환경과 인문 지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에는 각종 지도와 지리서가 제작, 편찬되었다.

태종 때에는 세계 지도로서 혼일강리도와 전국 지도로서 팔도지도 등을 제작하였는데,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다. 특히, 혼일강리도는 현재 남아 있는 동양 최초의 세계 지도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우리 나라를 사실보다 크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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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도
혼일강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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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세조 때에는 과학 기구를 이용하여 더욱 정밀한 지도인 동국지도를 제작하였다. 이 지도는 압록강 이북까지도 상세히 기록한 것이 특색으로, 당시 북방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또, 지리서로서는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으며, 이를 보완하여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여기에는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성씨, 고적, 인구, 토지, 산물, 교통 등을 자세히 수록하여, 당시 국토에 대한 인문 지리적 지식 수준을 크게 높였다.

법전과 의례집

조선 왕조가 통치 규범을 성문화하여 독자적인 법전을 편찬하려는 노력은 이미 태조 때부터 시도되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편찬하였고, 뒤에 조준은 조례를 모아 경제육전을 만들었다. 태종 때에는 이를 개정, 증보하여 속육전을 만들고, 세종 때에는 육전등록의 완성을 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세조 때부터 법전의 개편 작업이 진행되어 성종 때에 마침내 경국대전이 완성되었다. 그 뒤에도 경국대전은 여러 차례 보완되었으나, 기본적인 골격은 바뀌지 않고 왕조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사회적인 혼란을 극복하고 유교적인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조선 초기부터 윤리와 의례에 관한 책들을 편찬하였다. 즉, 세종, 세조 때에 삼강행실도, 효행록, 오륜록 등을 편찬하고, 때로는 이에 언해를 붙여 백성들이 쉽게 읽고 실천하도록 하였다. 또, 국가의 각종 행사에 필요한 의례를 정비, 제정하여 오례의, 국조오례의 등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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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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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서와 과학 서적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방을 강화하려는 노력에 따라 많은 병서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 나라의 지형, 지세에 맞는 전술을 개발하게 되었고, 화포 등 무기도 개량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역대의 전쟁사도 정리하게 되었다.

즉, 태조 때에는 진도를 비롯한 각종 병서가 편찬되어 독특한 전술과 부대 편성 방법이 창안되었다. 세종 때에는 병장도설이 편찬되어 군사 훈련의 지침으로 사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화포를 제작, 사용하는 방법도 개발되었다. 그리고, 문종 때에는 동국병감이 편찬되어 전쟁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우리 나라 풍토에 맞는 농사 기술과 품종 등의 개발을 위하여 세종 때에 농사직설을 편찬하였고, 성종 때에는 강희맹이 금양잡록을 저술하였다. 특히, 농사직설은 농부들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하는 법 등의 농사 기술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의약에 있어서도 경험을 토대로 하여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세종 때에 향약집성방이라는 약학서를 펴냈다. 또,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편찬하여 민족적인 한방 의학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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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방유취
의방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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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역법도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재구성하여 세종 때에 칠정산(七政算)이라는 새로운 달력을 펴냈다. 이것은 중국과 아라비아 달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것인데, 1년을 365.2425일로, 1개월을 29.530593일로 계산한 것으로, 오늘날 쓰고 있는 달력과 그 계산법이 거의 비슷하다.

과학 기술

조선 초기에는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하여 과학 기술학을 장려하였고, 철학 사조도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존중하는 경험적 학풍이 지배하였다. 유명한 유학자들은 대개 기술학을 겸하여 학습하였고, 특히 국왕들이 기술학 발전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전통적인 기술 문화를 계승하고, 여기에 서역 및 중국의 과학 기술도 적극 수용하여 세계 기술 문화사상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교육의 진흥과 편찬 사업에 대한 노력은 먼저 활자 인쇄 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고려 시대의 활자 인쇄술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속 개선되어 계미자, 갑인자 등 정교한 활자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각종 서적을 대량으로 간행하여 교육 진흥을 촉진시키고,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지술의 발달 또한 출판 문화의 발달에 커다란 밑받침이 되었다. 종이 만드는 원료만도 20여 종이 개발되고, 그 생산량도 세종 때 자치통감을 찍어 내는 데 30만 권, 세조 때 대장경을 인쇄하는 데 46만여 권의 종이를 소비할 정도로 방대하였다.

농업 진흥에 대한 깊은 관심은, 농학의 발달과 동시에 농업에 관련된 천문, 기상, 역법, 측량, 수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천체, 시간, 기상, 토지의 정확한 측정을 위한 각종 기구가 발명, 제작되었다.

천체 관측 기구로서 혼의, 간의 등이 제작되고, 시간 측정 기구로서 해시계(앙부일귀), 물시계(자격루) 등이 제작되었는데, 그 성능이 매우 우수하였다. 특히, 세종 24년(1442)에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제작하여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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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계(앙부일귀)
해시계(앙부일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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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때에는 토지 측량 기구인 규형(인지의)을 제작함으로써, 양전 사업과 지도 제작에 이용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다.

또, 천문 역법에 대한 깊은 관심과 토지 조사, 조세 수입의 계산 등의 필요에 따라 수학이 발달하였다. 당시 수학 교재로는 상명산법, 산학계몽 등이 있었는데, 아라비아 수학의 영향을 받아 그 수준이 높았다.

국방 강화 정책과 관련하여 무기 제조 기술도 크게 혁신되었다. 고려 말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화약, 무기 제조 기술은 더욱 개량되어, 사정 거리가 1300보나 되는 화포가 만들어지고, 문종 때에는 로케트포와 비슷한 화차가 제조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수레 위에 신기전(神機箭) 100개를 설치하고, 심지에 불을 붙여 쏘게 하는 것이었다. 또, 병선 제조 기술이 개량되어 태종 때에는 뛰어난 전투선인 거북선이 제작되고, 작고 날쌘 비거도선(鼻居刀船)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무기의 발달은 여진족 및 왜구의 격퇴에 큰 효력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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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전(좌)과 발사대(화차)(우)
신기전(좌)과 발사대(화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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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5세기의 이러한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달은, 16세기 이후 기술을 천시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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