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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학과 예술의 발달

문학

조선 시대의 문학은 한문학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초기의 한문학은 사장(詞章)을 좋아하는 관료 문신들에 의하여 발달되었는데, 스스로 자기 문화를 가지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동문선의 편찬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은, 성종 때에 서거정이 우리 나라 역대 시문 가운데 뛰어난 것을 뽑아 모은 것으로, 그 서문에서 “우리 나라의 글은 송이나 원의 글이 아니요, 한⋅당의 글도 아니며, 곧 우리 나라의 글이다.”라고 밝혀, 자주적인 정신을 나타냈다. 조선 초기의 한문학은 이러한 정신적 바탕 위에서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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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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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려 후기 신진 사대부들 사이에 유행했던 설화 문학이 그대로 계승되어 발전하였는데, 특히 필원잡기, 동인시화, 용재총화, 청파극담, 추강냉화, 패관잡기 등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은 비록 한자를 빌어 썼으나, 그 내용은 대개 우리 나라 서민 사회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역사, 전설, 풍습, 신앙 등이 담겨 있어서 민족 문학으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

설화 문학을 발전시킨 이는 김시습이다. 그가 지은 금오신화는 민간 설화를 소설 형식으로 이끌어 올린 것인데, 여기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평양, 개성, 경주 등 옛 도읍지를 배경으로 우리 나라의 고유한 신앙과 연결된 생활 감정과 역사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고려 시대에 싹을 보인 시조 문학도 초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시조들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중앙의 고급 관료들의 시조로서, 여기에는 주로 새 왕조의 건설을 찬양하거나 새 사회 건설의 희망과 정열을 토로한 것과 외적을 물리치면서 강토를 개척하는 진취적인 기상을 나타낸 것, 농경 생활의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묘사한 것들이 많다. 패기와 자신이 넘치는 호방한 시조로서는 김종서와 남이의 작품이 뛰어났다. 다른 하나는, 유교적 충절에서 우러난 재야 학자들의 시조로서, 길재, 원천석 등의 시조가 유명하다.

그리고, 시조 문학은 훈민정음 창제로 더욱 발전하여 우리 나라 특유의 시가로 정형되었으며, 또 악장과 가사 문학의 발전도 가져왔다. 악장 문학으로는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을 들 수 있다.

왕업을 찬양하는 각종의 악장은 조선 초기부터 유행하였으나, 한시(漢詩)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창제로 점차 이러한 가사 창작이 가능했고, 뒤에는 이른바 가사 문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건축과 공예

조선 초기에는 건축에 있어서도 새로운 특성들이 나타났다. 고려 시대에는 사원 건축이 중심인 데 비해, 조선 초기에는 도시의 궁궐과 성곽, 성문, 그리고 학교 건축이 중심을 이루었다.

건축의 특색은, 건물의 규모가 법적으로 규제되어 있어서 그 크기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점이었다. 건물의 크기는 그 안에 거주하거나 그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일정한 차등을 두었다. 이것은 신분 질서를 지키려는 뜻도 있었지만, 불필요한 사치를 막자는 데도 이유가 있었다.

그리하여, 건축은 대체로 규모가 작고 검소하면서도 위엄을 갖추었고, 어느 건물이나 건물 자체의 균형뿐만 아니라, 주위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현존하는 것으로는 서울의 숭례문, 창경궁의 홍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개성의 남대문, 해인사의 경판고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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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
돈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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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건물에 부속된 정원도 인공을 되도록 가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살린 것이 조선 시대 정원의 특색이었다. 그러한 특색을 살린 대표적 정원으로는 창덕궁 후원(비원)과 창경궁 후원(창경원)을 들 수 있다.

공예는 상류 계층의 사치품이 아니라, 사대부의 의식주의 필수품이나 문방구 등과 관련하여 특색 있는 발달을 보았다. 따라서, 공예품의 재료도 금, 은, 구슬과 같은 보석류를 별로 쓰지 않고, 나무, 대, 흙, 왕골 등과 같은 값싼 재료를 많이 이용하였다.

생활 필수품으로 만들어진 식기와 문방구 등은 견고할 뿐 아니라, 그 형태나 색깔도 서민적인 정취를 살려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초기의 도자기는 고려자기의 기법을 이어받아 새롭게 발전한 회청색의 분청사기를 만들어 냈으며, 한편으로 세련된 백자가 널리 유행하였다.

백자는 태토(胎土)가 훨씬 견고할 뿐 아니라, 청자보다 깨끗하고 담박하며 검소한 아름다움을 풍겨서, 왕족이나 사대부의 취향에 가장 걸맞은 멋을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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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항아리
백자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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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전국에 자기소(瓷器所)와 도기소(陶器所)가 있어 도자기 생산이 매우 활발하였다.

또, 목공예 분야도 자기 공예와 더불어 특수하게 발달하였다. 장롱, 궤, 문갑, 연상(벼루 상자), 탁자, 그 밖에 사소한 기물들은 대개 나무로 만들어서 사용하였는데, 실용성과 예술성을 잘 조화시켜, 자연미를 최대로 살리면서 고상하고 기품 있는 공예품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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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
장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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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화장품 그릇, 실패 등에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쇠뿔을 얇게 쪼개 붙이는 화각 공예와, 대그릇, 칠그릇, 자개 그릇 공예가 발달하였다.

회화와 서예

그림은 도화서에 소속된 전문 화가인 화원(畵員)과 관료 문인들의 그림으로 나누어지는데, 그들은 모두 뛰어난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이 시대의 그림들은 진취적이고 발랄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여, 인물과 산수를 씩씩하고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화원 출신의 화가로는 안견, 최경, 이상좌가 가장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안견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대 화풍을 깊이 연구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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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보월도
송하보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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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의 대표작 몽유도원도는 도원이라는 이상 세계를 그려 낸 것으로, 구도가 웅장하고 필치가 씩씩하며 풍경이 신비하다.

관료 문인 화가로는 강희안, 강희맹 등이 유명하고, 신숙주는 화기(畫記)를 써서 안평 대군의 소장품을 소개하였다.

강희안의 대표작 고사관수도는 간결하고 호방한 필치로 자연 속에 파묻혀 깊은 사색에 빠진 인간의 내면 세계를 그려 낸 걸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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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관수도
고사관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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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그림들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의 일본은 조선 문화의 수용에 열성적이었으므로, 많은 그림이 일본에 전해져 그 곳 화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조선의 사신들도 일본을 여행하는 중에 그림과 글씨를 많이 남기고 돌아와 직접적인 영향도 적지 않게 주었다.

서예는 그림과 달라서, 학자라면 누구나 터득해야 할 교양이었으므로 글씨에 능한 사람이 많았으며,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이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안평 대군은 조맹부체의 글씨를 개성 있게 발전시켜 이름이 높았고, 양사언과 한호는 각각 초서와 해서에 능하여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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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의 글씨
한호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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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에 있어서도 커다란 성과가 나타났다. 세종 때, 박연을 비롯한 음악가들은 수십 종의 악기를 새로 만들어 내거나 개량하고, 악곡과 악보를 새로 정리하여 궁중 음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는데, 이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궁중 음악(아악)으로 전한다. 성종 때에는 성현 등이 국악을 비롯한 동양 음악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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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궤범
악학궤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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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종
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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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음악과 별도로 당악, 향악 등의 속악도 발달하였는데, 민간에서는 농악무, 무당춤, 승무 등의 민속 무용을 즐겼다.

한편, 산대놀이라는 가면극과 꼭둑각시 놀음인 인형극이 사회에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산대놀이는 바가지나 종이 따위로 만든 탈을 쓰고 하는 연극으로서, 고려 시대부터 전해 오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 들어와 민간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그 내용은 주로 양반에 대한 풍자나 파계승에 대한 조소 등이었으며, 후기에 더욱 성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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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대놀이
산대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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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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