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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림의 성장과 관료 간의 대립

사림의 성장

조선 왕조의 문물 제도가 완성된 성종 때를 전후로 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을 사림파라고 불렀다.

사림의 연원은 고려 왕실에 절의를 지켰던 정몽주, 길재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길재는 고향인 선산에 내려가 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다. 그 후, 김종직에 이르러 그 수가 부쩍 늘어 영남 일대에서 은연중에 큰 지방 세력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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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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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학풍은 관학의 사장(詞章) 중심의 학풍과는 달리 경학에 치중하고, 인간의 심성을 연구하는 성리학을 학문의 주류로 삼았다. 사림에서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을 이단으로 배격하고, 중앙 집권 체제보다는 향촌 자치제를 내세웠다. 그들은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고 학술과 언론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추구하였다. 사림은 향촌에서 학문 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의식을 굳히고 있었으나, 왕권이 강화되고 제도의 정비가 진척되는 조선 초기에는 그들의 뜻을 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리학 사상이 조선 왕조의 지도 이념으로 자리를 굳히고 지방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자, 사림들은 서서히 중앙 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사화의 발생

훈구 세력에 의하여 지배되던 조선 왕조는, 성종 때부터 지방의 사림들이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함으로써 정치적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종은 훈구 세력의 일방적인 비대를 막고 문물을 한층 더 진흥, 발전시키기 위하여 학식과 덕행을 겸비한 참신한 인재를 발탁, 등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많이 진출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림파를 형성하여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 세력과 대립하였는데, 이는 학통과 출신 지방이 서로 달랐고, 학문적,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절의를 숭상하고 성리학의 정통적 계승자로 자부하였던 사림파는 사장 중심의 학풍을 비판하고, 자기 세력의 기반인 유향소의 설치와 향촌 자치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사림파가 현실을 비판하고 그들의 주장을 펴게 된 데는 훈구파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 사회의 모순이 많이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즉, 훈구파가 권력을 강화하고 농장을 더욱 확대하여,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사림들의 세력 기반을 많이 침해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의 정치를 주도했던 훈구파와 새로이 등장한 사림파와의 대립은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 때에 표면화되었다. 연산군의 거듭되는 실정을 계기로 일어난 무오사화,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사화로 사림들은 커다란 화를 입었다. 그러나, 중종 반정을 계기로 중용된 사림파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급진적인 개혁을 서둘렀다.

조광조 등은 사림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현량과를 실시하고, 사림을 무시험으로 등용하였으며, 반정 공신인 훈구 대신이 가진 토지의 몰수를 주장하여 이를 다시 조정하려 하였다. 또, 그들은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종교 행사의 폐지와 공납 제도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주장하고,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성리학적 윤리와 향촌 자치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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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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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사림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높여 주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여망에도 어느 정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사림들은 모든 개혁을 일시에 달성하려는 조급함을 드러내어, 마침내 반대파의 공세를 받게 되었다. 즉, 중종과 반정 공신들의 반발로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쫓겨났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한편, 젊은 사림들이 물러난 뒤 조정 권신들의 정권 다툼이 외척 간의 싸움으로 번져 명종 때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서원과 향약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와 대립했던 사림들은 몇 차례에 걸친 사화로 말미암아 많은 타격을 입고, 향촌으로 물러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향촌으로 물러난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바탕으로 다시 세력을 키워 갔다.

서원은,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그 시작이다. 서원은 본래 선현을 제사하고 추모하는 시설로, 지방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자제들을 교육하는 기관이기도 하였다. 백운동 서원은 이황의 건의로 소수 서원으로 사액(賜額)되고, 국가로부터 서적과 토지, 노비 등을 받아 경제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후에 많은 서원이 여러 지방에 설치되었다. 이리하여, 서원은 점차 향촌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림의 중요한 지방 조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러한 서원의 보급은 조선 시대의 학문을 깊이 있게 발전시키고, 학문의 지방적인 확대를 가져왔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사화에 의하여 탄압받은 사림들은 경제 기반을 가진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 및 당파의 결속을 강화하고, 세력을 키워 다시 뜻을 펼 기반으로 삼았다. 또, 사림은 서원에 들어감으로써 양반의 지위를 보장받고, 국가의 각종 부담에서 면제되었다. 이와 같이, 서원의 사림 세력이 강화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겨, 마치 고려 시대의 불교 사원의 폐단과 비슷한 양상을 드러냈다.

한편, 서원과 함께 사림들의 지위를 굳게 해 준 것은 향약이었다. 원래 농촌에는 부락 단위로 공동체를 이루어 도덕을 서로 권장하며, 재난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서로 단결하여 도와 주는 미풍 양속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 공동체 조직을 계승하여, 여기에 유교주의에 입각한 삼강 오륜의 윤리를 가미해서 향촌 교화의 규약으로 발전시킨 것이 향약이다.

따라서, 향약은 지역에 따라 그 성격이 조금씩 달랐으나,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도덕을 서로 권장〔德業相勸〕하고, 과실을 서로 꾸짖으며〔過失相規〕, 예의와 풍속을 서로 나누고〔禮俗相交〕, 재난과 어려움은 서로 단결하여 도와 줄 것〔患難相恤〕 등이었다.

향약은 중종 때 조광조가 한때 실시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시행되더니,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선조 때에는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향약의 간부인 약정(約正) 등은 지방의 유력한 사림이 임명되었고, 그들은 향약을 통하여 향민에게 유교 도덕을 가르치고, 어려운 일을 서로 도와 주며, 규약을 어기는 자는 일정한 제재를 가하고, 심한 경우에는 동리에서 추방하여 향촌 질서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사림들은 중앙에서 임명된 지방관보다도 농민들에 대한 지배력이 큰 경우도 있었으며, 이는 상대적으로 그들의 지위와 세력을 성장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당쟁의 발생

여러 차례의 사화에 의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서원과 향약을 바탕으로 향촌에 뿌리를 깊이 내렸던 사림들은 그 세력을 확장하고 선조 때에는 마침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이들이 조선 후기 양반의 자리를 굳혀 갔다.

그러나, 사림 양반들 상호간의 대립과 반목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는 정치에 참여하려는 양반의 수는 더욱 많아지는 데 반하여 관직의 수는 일정했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사림을 중심으로 한 양반들은 농⋅상⋅공 등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고 평생을 학업에 정진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나아가려고 하였다. 따라서, 경제상으로나 정치상으로 균형된 양반 사회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반들의 관직 추구열은 더욱 고조되었고, 마침내는 파당을 만들어 정쟁을 일삼게 되었다.

당쟁은 처음 선조 때 인사의 권한을 가졌던 이조 전랑(銓郞)의 자리 다툼으로 비롯되었다.

당쟁은, 처음에는 학문과 이념의 차이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폐단이 크지 않았고, 오히려 사림의 정치 참여를 넓히는 기능도 가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리 민복보다는 자기 당파의 이익을 앞세우고, 이념보다는 학벌, 문벌, 지방 의식과 연결되어 국가, 사회 발전에 지장을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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