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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근세 사회의 발전
  • 4. 왜란과 호란
  • (2) 호란

(2) 호란

광해군의 정치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먼저, 양전과 호적 사업을 실시하여 전후에 피폐된 산업을 일으키고, 국가 수입을 늘리는 동시에, 성지와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란 중에 질병이 만연하여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에 비추어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불타 버린 사고(史庫)를 다시 갖추었다.

대외 정책에 있어서도, 명이 쇠약해지고 북방 여진족이 강성해지는 정세의 변화를 간파하여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여진족은 우리 나라와 명의 강성한 힘에 눌려서 국가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임진왜란으로 조⋅명 양국이 전쟁에 눈을 돌린 틈을 타서 건주위 여진의 추장 누루하치가 나타나 세력을 키워 후금을 세웠다.

후금은 중국 대륙을 차지할 야심을 품고 명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하였다. 명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에 공동 출병을 제의해 왔으나,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어려웠지만, 신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가지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강홍립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게 한 다음에 후금과 휴전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명과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내치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광해군의 혁신적이고 실리성 있는 정치는 임진왜란 후의 복구 사업에 큰 성과를 가져왔으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사림들에게는 후금에 대한 정책이 명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여져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우기, 광해군은 인목 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저촉되었던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호란

광해군은 정통 성리학의 학통을 이었다고 자처하는 서인 세력에 의하여 몰려나고 인조가 대신 즉위하니, 이를 인조 반정이라 한다(1623).

인조를 옹립한 서인 정권은 광해군 때의 중립적 외교 정책을 지양하고 친명 배금(親明排金) 정책을 뚜렷이 하였다. 즉, 왜란 때 도움을 받았던 명에 대하여 대의 명분을 앞세워 친선을 도모하고 후금과는 관계를 끊어 버렸다.

이러한 외교 정잭의 변화 속에 후금을 자극하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즉,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후금이 차지한 요동 지방을 빼앗기 위하여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주둔함으로써 후금을 긴장시킨 일과, 인조 반정 후에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후금과 내통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후금은 군대를 동원하여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왔다(1627). 왜란이 끝난 지 30년 만에 또 다시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후금의 군대는 평안도 의주, 정주, 선천, 곽산 등지를 거쳐 황해도 황주에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 정봉수와 이입 등은 의병을 조직하여 용골 산성과 의주 지방에서 각각 적을 맞아 싸웠고, 그 밖의 지역에서도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그러나, 본래 후금은 우리 나라보다는 중국 대륙을 장악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양국 간에 쉽게 화약이 이루어져 형제 관계를 맺고, 후금의 군대는 철수하였다.

후금은 그 후 세력이 더욱 커져서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황제라 칭하면서 우리 나라에 대해 군신 관계를 맺도록 요구해 왔다. 이 무례한 요구에 조야의 국민들은 모두 분노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조정의 논의는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즉시 무력으로 청을 응징하자는 척화파들의 주장으로서, 중화 국가인 명과 이적(夷狄) 국가인 청을 동등하게 종주국으로 대우하여 사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대의 명분을 내세우는 자세였고, 다른 하나는, 명분보다도 현실적인 국제 정세와 국가의 실질적인 이득을 중요시하는 주화파의 주장으로서, 그들은 외교 담판으로써 청의 침략을 저지한 다음에, 내정 개혁을 통해서 국력을 키우자는 현실적인 자세였다.

그러나, 준비도 없는 가운데 대세는 척화 주전론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 태종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쳐내려와 서울을 점령하였다(1636).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45일간 대항하였으나, 사태가 기울어진 것을 깨닫고 주화파인 최명길 등이 중심이 되어 청과 강화를 맺었다.

이리하여, 조선은 청과 군신 관계를 맺고, 명과의 관계를 끊었으며,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의 두 왕자와 척화파의 주동 인물들을 인질로 보냈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3학사는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다.

북벌론의 대두와 나선 정벌

청은 조선과 화약을 맺은 후, 이어서 명마저 정복하여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커다란 국제 정세의 변동과 조선이 당한 굴욕 속에서 조야의 민심은 울분에 가득 차 드디어 북벌론이 일어났다.

북벌론은 청을 정벌하여, 문화가 높은 우리 나라가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나아가서는 우리 나라의 오랜 우방 국가로서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에 대하여 의리를 지키자는 주장이었다. 송시열, 송준길, 이완, 임경업 등은 북벌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들로서, 군대를 양성하는 등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북벌론은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봉림 대군) 때에 가장 왕성하였으며, 그 뒤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쇠퇴하였다. 그 후에는 청의 문물이 발달함에 따라 도리어 그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북학 운동까지 나타났다.

조선에서 북벌 운동이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시베리아 지방에는 러시아 세력이 밀려왔다. 러시아 세력의 침략으로 위협을 느낀 청은 정벌군을 파견하고, 아울러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동시켜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는데, 이를 나선 정벌이라 한다. 나선 정벌에서의 승리는 당시의 총수병(銃手兵)의 실력을 입증한 것이다.

사회 발전의 새로운 움직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시련을 극복한 조선 사회는 안으로부터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전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규명하고, 이러한 전란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반성의 기운이 일어났다. 아울러, 전란으로 입은 큰 피해를 속히 복구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며, 부국 강병의 길을 찾으려고 하였다.

한편, 일부 학자들 사이에는 학문 연구가 국민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학문적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기도 하였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발전을 지향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나타낸 것이다. 이로부터 조선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개혁이 추진되었고, 새로운 학풍과 문화의 폭이 확대되어 갔으며, 국민 생활에 다른 모습이 나타나 새 사회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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