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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4차(하)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1.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과 대외 관계
  • (1) 정치⋅군사상의 변화

(1) 정치⋅군사상의 변화

비변사의 확대, 강화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이 사화, 당쟁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적인 혼란이 가중되어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왜구와 여진족이 자주 침입하자, 국방력을 강화하고 변방을 방어하기 위하여 중종 때에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초기의 비변사는 지변사 재상(知邊司宰相)을 중심으로 군무를 협의하는 임시 기구였으나, 명종 때에 이르러서는 상설 기구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비변사는 문무 고위 관리들의 합의 기관으로 확대되고, 군사는 물론 내치와 외교 등 일반 정무까지도 처결하는 기관으로 그 기능이 강화되었다. 즉, 당시의 정부는 일찌기 겪어 보지 못했던 국난을 수습, 타개하기 위하여 문무 고위 관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혜를 모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므로, 이미 설치되었던 비변사의 기능을 확대, 강화시켜 이러한 일들을 처결해 나갔다.

왜란 이후에 전후 사회의 수습과 복구는 물론, 여진족의 침입과 당쟁의 격화로 인한 사회의 혼란이 계속되어 중지를 모아야 할 일들이 많아지게 됨에 따라 사소한 일까지도 비변사 회의에서 의논하게 되었다.

비변사에는 위로 3정승으로부터 공조를 제외한 5조 판서, 군영 대장들, 유수, 대제학, 그리고 군무에 능한 현⋅전직 고관 등 당상관 이상의 문무 고위 관리가 참여하였는데, 이로써 최고 정무 기관인 의정부의 기능은 사실상 유명 무실하게 되었다. 또, 비변사 기능의 확대, 강화는 상대적으로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으며, 때로는 폐지론에 부닥치면서도 19세기 후반까지 존속되어 왔다.

5군영과 속오군

조선 초기의 5위 체제가 허술해지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 무력함이 드러나게 되자, 군사 제도의 개편이 시급해졌다.

그리하여, 유성룡 등의 적극적인 주장에 따라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훈련도감은 왜란 극복을 위한 군사를 양성하기 위해 편성된 부대로, 삼수병(포수, 살수, 사수)으로 편제되었다. 삼수병은 조총대인 포수를 중심으로 하여 모두 장번 급료병(長番給料兵)으로서, 속오법에 따라 조직되었는데, 이후 훈련도감은 중앙의 핵심 군영이 되었다.

왜란 이후 후금(청)과의 관계 악화로 인한 국방력 강화와 당인들의 정권 유지를 위한 필요성 등으로 여러 군영이 차례로 설치되어, 숙종 초까지에는 5군영이 편성되었다. 즉, 인조 반정 후 이괄의 난을 계기로 어영청이 설치되었고, 경기 일대의 방위를 위해 총융청이 설치되었으며, 정묘호란 후에는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이의 수비를 위하여 수어청이 설치되었다. 효종 때에는 북벌을 내세워 어영청 등이 강화되었으나, 지나친 군비 확충으로 재정의 부족을 가져왔다. 숙종 때에 수도 방어를 위한 금위영이 설치됨으로써 5군영으로 정비되어, 초기의 5위 체제를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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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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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5군영이 종합 계획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때 그때 필요에 의해 설치되었기 때문에, 군대 조직은 속오법에 의했지만 각 부대의 재정 기반이나 병종이 달랐다. 즉, 훈련도감은 모두 장번 급료병으로 편성되었고, 어영청과 금위영은 기⋅보병을 중심으로 하여 선발된 군사들이 지방에서 교대로 번상했는데, 그들의 경제 기반은 보를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세 군영은 모두 수도 방어의 책임을 졌다. 또, 총융청과 수어청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근거로 경기도 일대의 속오군으로 편제되었으며, 수도 외곽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한편, 지방군에 있어서도 조선 초기의 진관 체제가 무너지면서 유사시 필요한 방어처에 동원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1) 조선 초기의 지방 군사 제도는 각 요지마다 진관을 설정하고 그 독자성을 살려서 진관 중심으로 이루어진 방어 체제였다. 진관 체제는 적의 침입 규모가 클 때에는 방어하기 어려웠으므로, 이 때에는 각 지역의 군사를 한 곳에 집결시켜 한 사람의 지휘하에 방어하게 하였다. 이것이 제승방략 체제이다.로 전환했는데, 왜란을 맞아 아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왜란 중에 진관을 복구하면서 속오군 체제를 취하였다. 즉, 위로는 양반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속오군으로 편제하고, 속오법에 따른 훈련으로 국난 극복에 대처하게 하였는데, 이후로 속오군이 지방군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속오군은 농한기에 훈련에 참가하는데, 평시에는 스스로 향촌을 지키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조직되었다.

정치적 대립의 격화

정계로 진출한 사림은 점차 최고 지배층을 형성하면서 정치 일선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왜란 이전에 자체 내의 지연, 혈연, 학연을 중심으로 동 인과 서인으로 분열되더니,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왜란을 겪고 난 뒤, 광해군 때에는 북인이 집권하였다.

북인 정권은 전후 복구 사업과 국방력 강화에 노력하는 동시에, 외교면에서도 지나친 명분론을 비판하면서 실리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 정책과 광해군의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여러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서인은 인조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서인 정권은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의 명분을 내세워 새 군영들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실제로 서인 정권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는 사병적 기능을 가지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북벌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방하고, 이에 협력하는 서인의 사류들을 등용하여 군비 증강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북벌은 실행되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서인 정권의 군사적 기반만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현종은 효종 때의 지나친 군비 증강에서 오는 재정적 궁핍을 타개하고, 증대된 서인 세력을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남인들을 등용하였다. 남인들은 북벌 운동의 무모함을 비판하면서, 예송(禮訟) 논쟁을 일으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도 처음에는 남인을 우대했으나, 그들이 당리를 앞세워 병권을 강화하자, 남인을 내몰고 서인을 다시 등용하였다. 서인은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영수로 하는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노론은 정통 성리학의 명분을 바탕으로 숭명 반청책(崇明反淸策)을 지지하였고, 소론은 남인과 마찬가지로 성리학과 대외 정책에 탄력성을 가지면서 내정 개혁에 치중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 때부터 당쟁은 세자 책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전개되었다. 권력 기반으로서의 병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세자 책봉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당쟁의 격화로 정계는 혼란하였고, 전후 복구를 위한 시책도 미봉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쟁은 반드시 나쁜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집권당이 정치를 책임져야 하고, 상대 당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하여 비교적 옳고 바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탕평책과 정치 안정

소론의 지지를 받던 경종의 뒤를 이어 영조가 즉위하였다. 영조는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탕평책을 썼는데, 노, 소, 남, 북의 당인들을 고루 등용하여 관료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인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남인의 급진 세력이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켜 청주 지방을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영조는 노론을 중용하였다. 그리하여, 영조가 치세하는 동안에는 왕권이 강화되고 노론이 오랫동안 득세하였다.

힘써 하는 싸움, 나라 위한 싸움인가.

옷 밥에 묻혀 있어 할 일 없이 싸우놋다.

아마도 그치지 아니하니 다시 어이하리오.

말리소서, 말리소서, 이 싸움 말리소서.

지공 무사히 말리소서, 말리소서.

진실로 말리옷 말리시면 탕탕평평하리이다.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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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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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당인들이 장악한 병권을 왕권에 귀속시키고, 당쟁의 소굴처럼 되어 버린 서원을 300여 개나 정리하였다. 한편, 동국문헌비고, 속오례의, 속대전, 속병장도설, 무원록 등을 편찬하여 흐트러진 문물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또,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군역 제도를 시정하고, 민의의 상달을 위한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로써 왕권이 크게 신장, 강화되고, 관료 정치가 정비되어 민생 안정과 부국 강병에 기여하게 되었다.

정조는 영조의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 발전시켜 여러 가지 치적을 남겼다. 규장각을 설치하고, 정약용 등 인재들을 등용하여 학술 활동을 진흥시켰으며, 장용영(壯勇營)이라는 친위 부대를 설치하여 왕권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였다.

한편, 정조는 문헌 편찬 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대전통편, 동문휘고, 무예도보통지, 규장전운, 전운옥편, 증보문헌비고, 추관지, 탁지지 등을 편찬하였다.

이로써 왕조의 통치 체제는 한층 더 정비되고, 15세기에 버금가는 문화의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 이후로 순조, 헌종, 철종 등 나이 어린 왕이 잇달아 즉위하면서 다시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의 실권은 외척에게 집중되어, 약 60년간 변태적인 세도 정치가 계속됨으로써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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