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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2. 문화의 새 기운
  • (1) 실학의 발달

(1) 실학의 발달

실학의 배경과 그 성격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전통적인 기층 문화도 수용하였던 조선 초기의 문화는 16세기부터 점차 내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초기의 유교 문화는 안정된 국제 정세와 득세한 훈구 세력을 배경으로 16세기 전반까지도 국민 생활과 문화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사림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후부터는 점차 현실 생활과 거리가 멀어지고, 당쟁의 명분을 뒷받침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났다.

왜란과 호란은 사림의 집권 기간 중에 일어났는데, 이는 이들이 도덕적 명분만 고집하고 화합할 줄 모르며, 당쟁에만 몰두함으로써 사회 기반의 강화와 부국 강병을 등한히 했기 때문이었다.

왜란과 호란 중에 높은 문화적 긍지와 애국심을 가지고 저항한 기백은 큰 것이었다. 그러나, 전란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명분을 바탕으로 한 성리학만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여진(청)과 일본을 멸시하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입장을 고집하며, 뒤떨어진 기술 문화와 사회적인 폐단을 시정,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일부 선각적인 유학자들은 성리학만 고집하는 문화의 한계성을 깨닫고,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를 균형 있게 발전시켜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달성함으로써, 안으로 분열된 사회를 다시 통합하고, 밖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할 수 있도록 국가 역량을 강화하려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정치와 문화를 혁신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16세기 말에 일부 동인 중에서 나왔다. 선조 때의 정여립과 광해군 때의 정인홍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도교나 비결, 정감록 같은 예언 사상을 신봉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많은 비결과 참서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선조 말년에서 광해군 때에 걸쳐 일어난 새로운 문화 운동은, 학문적 체계를 세우기도 전에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 운동은 학술과 종교, 철학, 문학, 예술 등의 모든 문화 영역에서 발생하였지만, 그 중에서 학술 분야에 나타난 새로운 학풍을 우리는 실학(實學)이라고 부른다.

실학자는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유학자들이었지만,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도 폭넓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의 학문은 실증적인 학풍을 지닌 점에 그 특색이 있다. 한백겸의 역사 지리 연구나 허준의 동의보감, 그리고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이수광의 지봉유설 편찬 등은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농업 중심의 개혁 사상

인조 반정 이후 17세기 후반부터는 실학자들에 의하여 보다 실리적이고 체계적인 개혁을 지향하는 학문 연구가 심화되어 갔다. 실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은 먼저 농촌 문제에 쏠렸다.

그리하여, 농민 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하여 토지 제도, 조세 제도, 정치 제도, 교육 제도, 관리 선발 제도, 군사 제도 등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으므로, 그들을 경세치용 학파라고도 하였다.

중농적 사회 개혁안을 처음으로 제시한 이는 17세기 후반의 유형원이었다. 그는 서울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관직을 단념하고 일평생 야인으로 지내면서 정치, 군사,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으며, 반계수록을 비롯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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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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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농촌 문제의 핵심이 토지에 있다고 보고 균전론을 주장하였는데, 그는 관리와 사⋅농⋅공⋅상에게 차등을 두어 토지를 재분배함으로써 자영농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영농을 바탕으로 병농 일치의 군사 조직과 사농 일치의 교육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문벌 숭상, 적서 차별, 과거 제도 등은 능력 중심의 출세를 가로막는 것이라고 보고, 노비 세습제가 사리에 맞지 않는 부당한 것임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가정 내에서의 적서 차별과 군대 편성상의 양반, 천민의 구별, 그리고 문음 제도를 긍정하였으며, 노비 제도, 그 자체는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가 지향하는 이상 사회는 사⋅ 농⋅공⋅상의 직업적 우열과, 상민과노비의 차별을 전제로 하면서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유교적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유형원의 중농적 개혁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이는 18세기 전반기의 이익이었다. 몰락한 남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실학 연구에 전념하여 성호사설을 비롯한 여러 저술을 남기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어 이른바 성호 학파(星湖學派)를 형성하였다.

그는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서 한전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 의하면, 농가 매호에 영업전(永業田)이라 하여 일정한 농지를 지정해 주고 이 농지는 매매를 할 수 없도록 하며, 그 밖의 토지는 매매를 허락하여 점진적으로 토지 소유의 평등을 이루자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라가 빈곤하고 농업이 피폐한 원인으로서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 제도, 기교(사치, 미신 숭배 등), 승려, 게으름 등 여섯 가지를 들고, 이를 나라의 좀이라고 규정하였다. 또, 농업과 농촌 문제를 중요시하는 입장에서, 당시 농민을 괴롭히고 있던 고리대와 화폐의 폐단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환곡 제도 대신 사창(社倉) 제도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익의 영향을 받은 실학자 중에서 저명한 이로는 안정복, 이긍익, 이가환, 이중환, 한치윤, 정상기, 신경준, 정동유, 유희, 정약용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정약용은 실학의 집대성자로 꼽힌다.

정약용은 남인 가정에서 태어나, 정조 때에는 한때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순조 원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에서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는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여생을 오직 저술에 몰두하여 500여 권의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여유당전서이다.

그의 학문 영역은 매우 넓어서 정치, 경제, 군사, 자연 과학, 철학, 언어학, 지리학 등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중에서 사회 개혁의 방안을 제시한 대표적 저술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3부작과 탕론, 원목, 전론 등 논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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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목민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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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농촌 문제를 해결할 이상적인 방안으로서 여전제(閭田制)를 구상하고, 보다 실현 가능한 방안으로 정전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여전제는 토지를 부락 단위로 공동 경작하고, 노동량에 따라 소득을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를 말하는데, 이것은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적인 제도였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국가가 장기적으로 토지를 사들여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자영 농민을 육성하고, 아직 국가가 사들이지 못한 지주의 토지는 병작 농민에게 골고루 소작하게 하는 정전제를 제시하였다.

정약용은 농민 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하여 향촌 단위의 방위 체제를 강화하고, 백성의 이익과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정치 제도에 대한 개선 방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이 밖에, 중농적인 개혁 사상가로 박세당, 홍만선, 서유구 등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사상과 학문은 많은 재야 지식인의 공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정책에는 별로 반영되지 않았다.

한편, 그들의 사상과 학문은 한말의 애국 계몽 사상가들과 일제 시대의 국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우리 나라 근대 사상의 중요한 한 갈래를 형성하였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 사상

18세기 후반에 와서 크게 발달한 상공업과 급속히 성장한 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경향의 실학 사상을 가진 학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청 및 그를 통하여 들어온 서양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북학파(北學派)라고도 하고,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 등 물질 문화의 발달에 관심을 쏟았으므로 이용 후생 학파라고도 한다.

중농적 실학자들이 농촌 생활의 경험을 많이 가진 남인파에서 주로 나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학파는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외국 여행의 경험이 있는 노론 집권층에서 다수 배출되었다.

이 학파의 선구적 학자는 18세기 전반기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서울의 소론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우서를 지어 중국과 우리 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농민의 소득 분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으나, 그보다도 농업의 전문화와 상업화, 그리고 농업 기술의 혁신을 통한 생산력의 증대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농업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부(國富)의 원천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중농학파와는 다른 입장에 섰다.

한편, 상공업을 진흥시키는 방안으로서 상인 간의 합자를 통한 경영 규모의 확대와 상인이 생산자를 고용하여 생산과 판매를 주관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대상인이 지역 사회의 개발에 참여하고, 학교 건립, 교량 건설, 방위 시설 구축 등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세기 후반의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임하경륜, 의산문답 등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담헌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는 균전제를 주장하여 농업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기술 문화의 혁신과 신분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 강병의 근본이라고 믿었다.

박지원에 이르러 북학 사상은 한층 발전되었다. 그는 청에 다녀온 후 유명한 열하일기를 남겼거니와, 그 이전에 이미 양반전 등 소설을 써서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등과 같은 농업 관계 저술도 남김으로써 넓은 영역에 걸친 개혁안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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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농파 실학자들이 토지 분배에 주로 관심을 가진 것과는 달리, 그는 한전론(限田論)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영농 방법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농기구의 개량, 관개 시설의 확충 등과 같은 기술적 측면의 개선을 통해서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문제에 큰 관심을 쏟았다.

그는 농업 문제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에도 관심을 가져, 수레와 선박의 이용이나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와 병행하여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박제가는 북학의를 써서 중상적 개혁 사상을 발전시켰다. 서울의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이덕무, 유득공 등 다른 서얼 출신의 학자들과 어울려 한때 규장각에 봉직했는데, 세 번이나 청에 다녀와 넓은 안목을 가지고 부국 강병을 위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전을 열렬히 희구하여, 그 방안으로서 청과의 통상을 강화할 것과 수레나 배의 이용을 늘릴 것, 그리고 절검보다는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자극시킬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 소비와 생산과의 관계를 우물에 비유하여, 우물물은 퍼낼수록 가득 차고 버려 둘수록 말라 버리듯이, 소비는 생산의 촉진제라고 보았다. 이것은, 절약과 저축만으로는 부의 증진이 어렵고, 생산의 증대가 따라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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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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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의 개혁 사상은, 농업에만 치우친 유교적 이상 국가론에서 탈피하여, 부국 강병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러한 북학파의 사상은 당시에는 큰 반응을 얻지 못했으나, 뒤에 와서 박규수, 김옥균 등 개화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우리 나라 근대 사상의 형성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국학 연구의 확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애국심이 고조되고, 이에 따라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학이 발달하였다.

먼저, 역사 연구가 활기를 띠어 많은 사서가 편찬되었다. 그러나, 17세기의 사서들은 16세기와 마찬가지로, 유교 문화를 중심으로 국사에 대한 인식을 체계화하려는 한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임상덕의 동사회강, 안정복의 동사강목, 유득공의 발해고 등이 잇달아 나오고, 19세기 초에는 한치윤의 해동역사,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 역사 연구가 활발해졌다. 특히, 동사강목은 선배 학자들의 역사 연구 내용을 종합하고 새로운 역사 사실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우리 나라 고증 사학의 토대를 닦았다. 해동역사는 500여 종의 외국 자료를 인용하여 국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연려실기술은 400여 종의 자료를 참고하여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한 것으로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서술로써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종휘와 유득공은 고구려와 발해사 연구에 큰 공적을 세웠는데,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으로 확대시킴으로써 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기에 힘썼다.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은 체계적인 사서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여 민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실학자들의 애국적 관심은 국토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켜, 우수한 지리서와 지도가 제작되었다. 지리서로는 유형원의 여지지를 비롯하여 이중환의 택리지, 신경준의 강계고,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와 대동수경, 그리고 한진서의 해동역사지리고,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이 저술되었다. 특히, 택리지는 우리 나라 각 지방의 자연 환경과 인물, 풍속, 인심의 특색 등을 흥미 있게 서술한 인문 지리지이다.

지도 제작에는 영조 때의 정상기와 철종 때의 김정호의 업적이 가장 뛰어났는데, 전자는 동국지도를, 후자는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을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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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서울 부분)
대동여지도(서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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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의 지도는 행정적, 군사적인 목적이 주가 되었으나, 이 시기의 지도는 산업, 경제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산맥과 하천, 목장, 제언, 항만,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해진 것이 큰 특색을 이루었으며, 상인들에게 널리 이용되었다.

한편, 국어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유희의 언문지와 그 밖에 우리말의 어휘를 수집한 것으로 유희의 물명유고, 이성지의 재물보, 이의봉의 고금석림, 정약용의 아언각비 등이 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금석문에 대한 연구도 촉진시켰다.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지어 금석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확인하고, 이것과 아울러 그전부터 알려져 있던 황초령 비문을 판독하였다.

문화 인식이 넓어짐에 따라 백과 사전의 성격을 띤 저서가 편찬되었다. 일찌기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지어 문화의 각 영역을 항목별로 나누어 기술하였는데, 18~19세기에는 이러한 학풍이 한층 발전하여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이 편찬되었다.

영조 때에는 왕명으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는데, 이 책은 우리 나라의 지리, 정치, 경제,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학 백과 사전이었다.

실학 시대에 이루어진 국학의 성과는 매우 큰 것으로, 오늘의 국학 연구도 이러한 업적 위에서 계승,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서학의 전래

명에는 선교 사업에 종사하던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 문화가 전해졌고, 조선에서는 명을 왕래하는 사신들에 의해 서양 문물과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 관계 서적과 천주교 교리서 등이 들어왔는데, 이를 서학(西學)이라 불렀다. 여기에, 학문적 흥미를 가지고 서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서학은 처음에 신앙으로서 받아들여졌다기보다는 서양 학문의 일부로서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서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에 비판적 입장을 지닌 북인 계통의 학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허균은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같은 때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맛테오 릿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를 소개하면서 불교와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수광과 비슷한 시기에 유몽인은 그의 어우야담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유교, 불교, 도교와의 차이점을 논하기도 하였다. 인조 때 정두원은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뒤에 청에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 세자는, 뻬이징에서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 사귀고, 돌아오는 길에 천주교 서적과 그 밖의 서양 서적 및 과학 기구 들을 가지고 왔다.

또, 천주교의 천래와 더불어 서양의 과학 기술 문화도 전해지기 시작하여 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과학의 연구

조선 후기에는 부국 강병과 민생 향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자연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도 커다란 성과들이 나타났다.

먼저, 의학 분야에서는 광해군 때에 허준의 동의보감과 허임의 침구경험방이 저술되었고, 그 뒤에 박진희, 이헌길 등의 마진에 관한 연구가 있었으며, 정약용은 이를 정리하여 마과회통을 저술하였다. 특히, 정약용은 박제가 등과 더불어 종두법을 처음으로 연구, 실험하였다.

이러한 의학의 전통은 고종 연간에 와서도 발전을 보아 황필수가 방약합편을 저술하였으며,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사상의설(四象醫說)을 주장하였는데, 이 학설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나라 한의학의 한 파를 이루고 있다.

농학 분야에서는 효종 때에 농가집성이 편찬된 이래로 많은 농서가 출간되었는데, 박세당의 색경,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박지원의 과농소초, 그리고 정조 때에 왕명으로 편찬된 서호수의 해동농서 등이 유명하다. 농가집성이 수전 농업 중심의 성리학적 농법을 바탕으로 한 것과는 달리, 색경 이하의 농서들은 농업, 임업, 축산, 양잠, 약재, 공예 작물 등 넓은 영역을 포괄하여 우리 나라 실정에 맞는 새로운 경영 방법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축산, 어업과 관련하여 동⋅식물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색경, 산림경제 등에도 이에 관한 언급이 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지어 어류학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근해의 해산물 등을 직접 채집, 조사하여, 155종의 해물에 대한 명칭, 분포, 형태, 습성 등을 기록한 것이다.

천문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는데, 이미 17세기 초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일식, 월식, 벼락, 조수의 간만 등에 대하여 언급한 일이 있고, 김석문,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은 지전설을 내세워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조선 후기에 자연 과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조선 전기에 이룩된 과학적 성과들을 창의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데 근본 원인이 있으나, 명말, 청초 이래로 들어온 서양의 과학 기술 문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이미 선조 말년에 중국으로부터 서양인이 작성한 세계 지도를 입수하였고, 인조 때에는 정두원이 명에서 천주교 서적과 함께 화포, 천리경, 자명종, 천문서 등을 가져왔다.

한편, 인조 때에 우리 나라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 인 벨테브레(Weltevree)와 효종 때 표착한 하멜(Hamel) 일행은 우리 나라의 서양과 서양인에 대한 관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정약용은 기술의 진보가 사회 발전에 끼치는 영향을 중요시하여, 스스로 많은 기계를 제작하거나 또는 설계하였다. 그는 한강에 가설할 주교(舟橋)를 설계하였고,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서양 축성법을 본받아 수원성 축조에 거중기를 사용하였으며, 조선, 총포, 병차 등에 관해서도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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