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4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4차(하)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2. 문화의 새 기운
  • (3) 유교 철학의 동향

(3) 유교 철학의 동향

성리학의 경향

이황에 의해서 대성된 주리 철학(主理哲學)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집권파 양반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어 유교 철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일본과 여진족의 침략을 겪고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 문화의 자극을 받는 과정에서, 주리설은 점차 이일원론(理一元論)으로 발전되면서 위정 척사 운동의 철학적 기반을 이루었다. 주리설의 대표적 학자는 기정진, 이진상 등이다.

이이 등에 의해 그 체계가 잡힌 주기설(主氣說)은 실학 계열(특히 북학파)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 밖에 한원진, 임성주 등을 거쳐 개화 사상가들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동인 학자 중에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더니,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남인과 소론 중에서 주자와 다른 경전 해석을 시도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17세기 후반의 남인 학자 윤휴는 4서 3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에 대하여 주자와 다른 주해를 내려서 성리학자들로부터 사문 난적, 즉 유학의 반역자라는 규탄을 받았다. 그는 “천하의 많은 이치를 어찌하여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 주자는 다시 태어난다 하여도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나 맹자는 다시 태어나면 내 학설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윤휴와 비슷한 시기에 박세당도 성리학을 비판하다가 사문 난적으로 몰렸다.

18세기 말에 정약용은, 주자의 해석만을 따르는 성리학 연구에 대하여, 고주(古註)를 참작하고 직접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연구하여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 후, 19세기 중엽의 최한기는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주기설과 관련된 경험주의 철학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켜 개화 철학의 선구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김정호의 지도 제작과 더불어 19세기 중엽의 평민층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으나 국내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100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가운데 일부만 명남루총서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양명학의 연구

성리학을 비판하는 움직임은 양명학 연구에서도 나타났다. 양명학은 주로 경기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재야의 소론파 학자와 불우한 종친 출신의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연구되었다. 이미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일부 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왔는데, 18세기 초에 이르러 정제두가 양명학을 연구하여 학파를 형성하였다.

정제두는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존언, 만물 일체설 등을 써서 양명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는데, 그도 주자의 해석이 아닌 경전의 본뜻을 존중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영향하에 이른바 강화 학파로 불리는 양명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확대보기
정제두의 글씨
정제두의 글씨
팝업창 닫기

당시의 학자들 중에는, 성리학에만 치우친 조선 사회에서 이단으로 몰리는 것을 꺼려하여, 겉으로는 성리학을 신봉하지만 내심으로는 양명학을 숭상하는 학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양명학은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학문적으로 조선 사회에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였으나, 뒤에 김택영, 박은식, 정인보 등과 같은 국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