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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근대 사회의 태동
  • 3. 사회의 동요와 종교의 새 기운
  • (1) 사회의 동요

(1) 사회의 동요

신분제의 변화

사림이 성장하던 16세기경부터 초기의 신분제가 서서히 변모되면서 사회 계층은 양반, 중인, 상민, 노비로 분화되었다.

중기 사회는 많지 않은 양반층이 지배 세력을 이루었고, 중인이 지배 조직의 보조적 역할을 하였으며, 농민으로 대표되는 절대 다수의 상민층이 생산 활동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는 조선 왕조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19세기를 전후해서는 중기와는 달리, 양반의 인구는 점차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인구는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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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별 인구 통계(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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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이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양반 자체의 수가 계속 늘어난 데도 그 원인이 있었으나, 전란 때나 기근이 심할 때에 일부 부유한 농민이 납속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양반이 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여 양반 신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고, 유생을 사칭하거나 양반과 혼인을 하여 양반 신분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양반이 늘어남에 따라 양반 계급 내에 복잡한 계층이 생겨났다.

위로는 집권당파의 권세 있는 양반이 있는가 하면, 향촌 사회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는 향반(鄕班), 토반(土班)이 있고, 또 그 아래에는 중앙 정계에서는 물론 향촌 사회에서도 별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몰락 양반인 잔반(殘班)도 있었다. 따라서, 양반이라 해서 모두가 권세가 있고 재산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권세와 재산이 없는 양반은 이름뿐으로, 그 생활은 상민인 농민과 큰 차이가 없었다.

또, 노비들 중에는 의식적으로 도망하거나,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거나, 혹은 국가에 곡식을 바치거나 하여 상민이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리고, 상민이 줄어들고 양반이 늘어나는 것은 국가 재정상으로 불리하고 국방상으로도 지장이 있기 때문에, 노비를 서서히 풀어 주는 정책을 취했다. 특히,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공노비를 단계적으로 풀어 주어, 순조 때에는 약 5만 명의 노비를 해방시켜 주었다.

사노비는 공노비처럼 빨리 상민화되지는 못했으나, 옛날처럼 상전에게 강하게 예속되지도 않았고, 상민과의 결혼도 빈번해졌으며, 속오군 등에 편입되어 군역을 지게 됨으로써 그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를 전후해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 체제가 밑바탕에서부터 흔들려, 신분 간의 상하 이동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 이동이 정치 권력을 좌우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외척 세도 정치

18세기 영⋅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써서 당파의 균형을 유지하고, 여러 가지 개혁 사업을 추진하여 왕권의 강화와 확립에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속에서도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지배층 사이에 대립이 조성되었다. 즉, 영조 때에는 장헌 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그의 죽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벽파(僻派)가 생겨났다. 시파에는 일부 노론도 가담했지만 남인 계열이, 벽파에는 노론 계열이 가담하였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중용하고, 노론 벽파를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 헌종, 철종 등 나이 어린 임금이 잇달아 즉위하면서 정치적 실권이 왕의 외척 손에 넘어갔으니, 이를 세도 정치라 한다.

이러한 세도 정치는 3대, 약 60여 년 간 계속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왕실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일족 일문(一族一門)의 전제에 의하여 정치가 좌우되었다. 세도가의 일족이 요직을 독차지하여 국사를 마음대로 요리하였으며, 뇌물의 거래와 매관 매직 등 부정 행위를 자행하여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졌다.

농촌 사회의 동요

세도 정치로 말미암은 중앙 정치의 부정 부패와 타락은 그대로 지방 정치에도 파급되어, 지방 관리와 향리는 권력을 남용하여 사리 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그들은 법에도 없는 각종 세금을 마음대로 거두었으며, 백성을 잡아다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한 다음에야 풀어 주는 풍조가 생겼다.

군포에 있어서는 인징, 족징, 백골 징포, 황구 첨정 등이 더욱 성행하고, 환곡에 있어서는 부정 행위가 보다 두드러져 문란의 정도가 삼정(三政) 중에서 가장 심하였다.

이 시기에 농촌에서 지방관과 향리의 부정, 부패를 목격한 정약용은, 타락한 관기를 바로잡기 위해 목민심서를 저술하였다. 정부에서도 지방관의 비행을 단속하기 위해 암행 어사를 수시로 파견하였고, 삼정의 문란을 막기 위한 개혁의 노력이 있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대동법, 균역법의 시행과 중농 정책의 실현으로 다소 기운을 되찾았던 농촌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또,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서 나타나기 시작한 지주와 대상인의 횡포는 관리의 수탈 못지않게 컸다. 그리하여, 가난에 쪼들리고 빚에 몰린 농민들은 마침내 파산하여 고향을 떠나 유리 걸식하거나, 세금을 물지 않는 산간 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심지어는 도적 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민란의 발생

학정으로 곤궁에 빠진 백성들은 불만과 분노를 품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탐관 오리에 대한 반항과 민중의 자각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민중의 불만이 처음에는 학정의 금지를 요청하는 소청이나 탐관 오리를 비방하는 벽서 같은 형태로 나타나더니, 마침내 민란으로 확대되었다. 더우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속 흉년이 들고 전염병마저 유행하여 민심이 흉흉해지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민란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순조 때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철종 때 진주에서 일어난 소요 사건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가산에서 홍경래, 우군칙 등 중소 지주 출신인 몰락 양반과 중소 상인이 중심이 되고 광산에 모여든 유랑 농민이 합세하여 일으킨 것이다(1811). 난군은 선천, 정주 등을 점거하고,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정주성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진주 민란은 탐관 오리와 토호에 반항하여 일어난 농민 반란이었으며(1862), 이 난을 계기로 전라도의 함평, 익산, 충청도의 공주, 경상도의 개령 등 삼남 일대는 물론, 북쪽의 함흥으로부터 남쪽의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민란이 파급되어, 전국이 몹시 소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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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과 민란 봉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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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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