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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사회의 동요와 종교의 새 기운
  • (2) 종교의 새 기운

(2) 종교의 새 기운

도교와 도참 신앙

조선 중기에, 사림에 의하여 이단으로 배척되어 밀려난 도교와 도참 신앙은 선조, 광해군 때에 이르러 일부 재야 지식인 사이에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도인들은 환인, 단군을 우리 나라 도파(道派)의 시조로, 김시습을 중조로 각각 내세우면서 점차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하여 갔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도맥 전승을 적은 해동전도록이 17세기 초에 작성되었고, 역시 같은 시기에 조 여적은 은둔 생활을 하던 도인들의 행적을 모아 청학집을 펴냈다. 도인들은 도참 신앙이나 민간 설화를 신봉하여 명과 청의 교체를 예언하고, 조선 왕조의 몰락을 내다보면서, 성리학에 대해서 매우 강한 반발을 보였다.

도인들은 학문적으로 이론적 체계를 세우지 못하였으나, 그들의 활동은 일반 서민들에게 큰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도교와 관련된 예언 사상은 각종 비기, 참서에 반영되어, 정감록, 토정비결 등이 민간에 널리 유행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학, 예술은 도교와의 깊은 관련 위에서 전개되어 각종 야담, 패설, 소설 등을 낳았으며, 민화(民畫)의 발달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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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860년대에 성립된 동학은 이러한 사조가 평민적인 입장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천주교의 박해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익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남인파 학자들과 북학파 학자들은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넓혔는데, 그 중의 일부는 신앙의 차원에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이벽, 이가환, 이승훈, 권일신, 정약종 등은 천주교를 신봉한 대표적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유교의 근본 원리인 충효를 바탕으로 하여 크리스트 교의 사상을 이해하고, 구세 복음(救世福音)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윤리 체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중인, 상민을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천주교는 이렇듯,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문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주체적으로 수용되었으나, 신자가 늘어 갈수록 교리상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즉, 천주교에서는 우리 나라의 고유한 전례(典禮), 특히 제사 의식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고, 신분 질서에도 위협을 주게 되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천주교의 전파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다.

이에 정부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금령을 내리고, 뻬이징으로부터의 서적 수입을 금하였으며, 신주를 없앤 신도를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남인을 우대하고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썼기 때문에 커다란 탄압은 없었다.

정조가 돌아가고 순조가 즉위하여 노론 벽파가 득세하면서 대 탄압이 가해졌는데, 이것을 신유박해라 한다. 이 때,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등 남인 학자와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사형을 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등이 유형을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남인 세력은 크게 위축되고 실학도 급속히 쇠퇴되었다.

신유박해 후, 시파인 안동 김씨가 세도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그리 심하지 않아, 그 동안 조선 교구가 독립되고, 서양인 신부들이 몰래 들어와 포교하니 교세가 자못 떨쳤다. 그러나, 헌종 때 벽파인 풍양 조씨가 세도하면서는 다시 가혹한 탄압을 가하여 서양인 신부와 많은 신도가 희생되는 기해박해가 일어났다(1839).

철종 때 안동 김씨가 다시 집권하면서 탄압이 완화되어, 많은 서양인 신부가 들어오고 신도의 수도 2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고, 여러 가지 천주교 서적이 간행되는 등 그 교세가 확대되어 갔다.

천주교는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남인 시파 학자들이 많이 믿게 되었으나, 19세기 이후에는 대개 중인이나 상민 등 불우한 계층에서도 믿게 되었으며, 부녀자층의 신자들도 많이 늘어났다. 이와 같이 교세가 날로 커져 간 것은, 일족 일문의 전제적 세도 정치로 말미암아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민생이 어려워짐에 따라, 모든 인간은 천주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과 현실에서의 시달림에서 벗어나 영생할 수 있다는 내세적 교리가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주교의 전파는 지배층에게 유교주의 질서가 허물어진다는 불안한 위기 의식을 안겨 주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의식을 극복하기 위하여 유교적 입장에서는 척사론(斥邪論)이 일기 시작하였고, 한편 종교적으로는 동학이 일어나게 되었다.

동학의 발생

세도 정치 아래에서 고통받던 대다수의 민중들은 그들의 무계획적인 민란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는 경험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점차 민중을 위한 새로운 사상 체계를 요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때에 동학이 나타났다.

동학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경주의 향반 출신인 최제우였다. 동학은 그 후 최시형 등에 의하여 발전되었고, 그 교리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결집되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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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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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사상은 이미 서민에 대한 지도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성리학과 불교를 배척하는 동시에, 서구 열강의 동양 진출과 연결되어 있던 천주교도 배격하였다. 그리하여, 서학(천주교)을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동학이라 하였다.

그러나, 동학 사상은 전통적인 민족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천주교의 교리까지도 일부 흡수한, 종합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특히, 철학으로서의 동학은 주기론에 가까왔으며, 종교로서의 동학은 샤아머니즘과 도교에 가까와 부적과 주술을 중요시 하였다. 사회 사상으로서의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평등주의와 인도주의를 지향하고, 하늘의 운수 사상을 바탕으로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동학은 운수가 끝난 조선 왕조를 부정하는 혁명 사상을 내포하였고, 보국 안민(輔國安民)을 내세워 서양과 일본의 침투를 배척하였다.

이와 같은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동학이 창도되자, 이를 따르는 신도가 늘어나 삼남 일대에 퍼졌고, 포(包), 접(接) 등의 교단 조직이 이루어졌다.

동학도의 세력이 날로 번성해지자, 정부에서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민중을 미혹한다는 이유로 이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조 최제우를 체포하여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충청도 보은을 근거로 동학을 계속 퍼뜨려, 그 세력은 갈수록 뻗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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