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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흥선 대원군의 집정

(1) 흥선 대원군의 집정

전제 왕권의 강화

고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리하여, 국왕의 생부인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외척의 횡포 속에서 생명을 보존하면서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 왔던 야심 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권을 장악하자, 안으로는 전제 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열강의 접근에 대하여 쇄국 정책으로 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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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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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먼저 외척 세도의 권세를 누려 온 안동 김씨 일족을 몰아 내고, 당파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역량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 행정을 폈다. 또, 왕권 강화를 위하여 국가 기구의 재정비를 단행했다. 즉, 그 동안 문무 고관 합의체로서 주요 정무를 총괄해 온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 격하시키고, 의정부와 삼군부 본래의 기능을 부활시켜 정치와 군사를 분리시켰다.

그리고, 법치 질서의 정비를 위하여 대전회통(大典會通)과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을 편찬, 간행하게 하였다.

사상적으로 중농적 실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흥선 대원군은, 위민 정치(爲民政治)의 부흥을 내세워 문란해진 삼정을 바로잡으려 했다. 18세기 이후, 농촌 사회가 크게 분화, 발전되면서 농민의 정치⋅사회 의식이 높아 가고 있었는데, 이에 반해 정치 지배 계층의 의식은 전통적 구습에 젖어, 삼정을 악용해 농민을 괴롭혔다. 이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철종 말년에 삼남 일대에서 민란을 크게 일으켰다.

흥선 대원군은 집권 초에, 문란해진 삼정을 바로잡고 농민 생활의 안정을 꾀하는 획기적 개혁을 감행하였다. 토지 대장에 오르지 않은 땅을 찾아 내고, 토호들의 토지 겸병을 금지하며, 부분적이긴 하나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자 했다.

또, 종래 상민에게만 부과하였던 군포를 양반에게까지 확대해서 징수하는 동포제(洞布制: 후에 호포제)를 실시하였고, 지방 수령과 토호의 농간이 가장 심했던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함으로써 환곡을 합리적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또, 당쟁의 온상이며 국가 재정을 좀먹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도학과 절의에 뛰어난 인물을 봉사하는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600여 개소를 철폐하였다. 서원 철폐는 지방 유생들의 완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강경하게 실행되었다.

그리고, 권위가 추락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하여 경복궁을 중건하였는데, 이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고자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고, 당백전이라는 악화를 발행하여 경제적 혼란을 가져왔고, 양반들의 묘지림까지 벌목하였으며, 많은 백성을 토목 공사에 징발하였다. 이로 인하여, 흥선 대원군은 양반과 백성들의 큰 원성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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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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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 정책과 양요

60여 년 간에 걸친 세도 정치로 말미암아 조선 왕조의 유교 정치 질서가 문란해져 백성들이 고통을 겪던 19세기 전반기에,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산업 혁명을 거쳐서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였고,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구하기 위해 아시아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열강은 종교와 상품, 대포와 군함을 앞세우고 다투어 아시아 여러 나라로 침입해 오기 시작하였다.

먼저 영국이 중국을 굴복시켜 강제로 문호를 열게 하였고, 이어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뻬이징을 점령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하였다. 한편, 미국도 일본을 위협하여 그 문호를 여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 나라도 중국이나 일본보다 시기는 늦었으나 예외는 아니었다. 서양 선박이 이미 18세기부터 조선 연해에 나타났는데, 이를 이양선이라 불렀다. 그들은, 초기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접근하였으나, 19세기 이후로는 조선에 직접 통상을 요구해 왔다. 통상을 최초로 요구해 온 나라는 영국으로서, 상선 로오드 암허스트(Lord Amherst) 호가 조선 해역에 나타나 통상을 희망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후, 프랑스의 세실(Cècil)이 군함 3척을 끌고 와, 앞서 기해박해 때의 프랑스인 신부 처형에 대한 책임을 따지며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그 후, 서양 선박의 출몰이 부쩍 늘어나고, 약탈 행위가 자행되자, 이에 대한 불안이 높아져 갔다. 특히, 아편 전쟁에 이어 애로우(Arrow) 호 사건으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뻬이징을 점령하였다는 사실이 국내에 전해지자, 우리 나라 조야에는 위기 의식이 감돌게 되었다. 오랫동안 권위를 자랑해 온 청이 서양인의 무력에 의해 서울을 빼앗기고 황제가 피난을 가야 했다는 사실은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우기, 서양 세력이 조선에도 곧 침략해 들어오리라는 소문까지 돌아, 지방으로 낙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위기 의식은 하층 민중 사회에 있어서는 민족주의적인 동학을 낳게 한 배경이 되었으며, 보수적인 상층 양반 사회에 있어서는 위정 척사 사상을 굳히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1) 이 시기에, 한편으로는 서양 세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서양 기술을 받아들이고 통상 교역을 함으로써 국부 민강(國富民强)을 꾀하여야 한다는 개화 사상도 새로 대두되었다.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전부터 국내에는 이미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하여, 천주교도가 나날이 늘고 양화(洋貨)도 범람하고 있었다.

그 위에, 러시아가 뻬이징 조약 체결을 주선한 댓가로 연해주를 차지하게 되어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 나라와 접경하게 되었고, 러시아 인이 수 차에 걸쳐 두만강을 건너 경흥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해 와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던 흥선 대원군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을 막기 위하여 강경한 쇄국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는 외국의 통상 요구에 불응하고 양화 교역을 엄금하는 동시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가하였다(1866). 병인박해라 불리는 이 탄압으로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많은 교인이 죽음을 당하였으며, 그 뒤에도 탄압은 계속되었다.

이 때, 프랑스는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무력을 앞세워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로우즈(Roze)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하는 한편, 일부는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는 침략전을 벌였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의 굳은 항전 결심과 이항로 등 유학자들의 적극적인 척사론, 그리고 한성근, 양헌수가 이끄는 부대의 분전으로 문수 산성과 정족 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시켰다. 이것을 병인양요라 한다(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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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해역도
강화 해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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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흥선 대원군은 국방을 더욱 굳게 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한편, 러시아도 동해안에 선박을 보내어 통상을 요구하였고, 또 독일 상인 옵페르트(Oppert)는 영국 상선을 타고 충청도 연안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다. 옵페르트는 그 뒤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훔쳐 가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옵페르트의 만행은 흥선 대원군의 쇄국 의지를 더욱 강경하게 하였고, 백성들에게 서양인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여 배척하는 기운을 더욱 크게 하였다.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General Sherman)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의 군민과 충돌을 일으켜서 선원과 더불어 배가 소실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셔어먼 호 사건의 책임을 추궁함으로써 통상 조약을 맺고자 5척의 군함을 보내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를 일으켰다(1871).

당시 조선은 외침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었으므로, 미국 군함이 내침하자 어재연이 이끄는 경군(京軍)과 강화 수비군은 광성진과 갑곶 등지에서 완강히 대항하여 이를 물리쳤다.

두 차례의 양요를 물리친 흥선 대원군은, 서양 열강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굳어졌을 뿐 아니라 이를 격퇴하는 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전국에 척화 교서를 반포하고 주요 지역에 척화비를 세워 국민의 경각심과 궐기를 촉구하는 한편,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한층 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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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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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 정책은 서양 문물을 오랑캐의 문화로 간주하는 동시에, 조선의 유교 문화 전통을 존중하는 문화적 자부심을 강화시켰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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