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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근대 사회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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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개항

(2) 개항

개항 전의 국내외 사정

일본은 조선보다 앞서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와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재빨리 서양의 문물 제도를 받아들여 근대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강화되고 있을 때, 일본은 메이지 유신에 의한 새로운 정부의 성립을 조선에 알리면서 새로 수교할 것을 청해 왔다. 그러나, 조선측에서는 일본이 보내온 국서의 내용이 매우 오만하다 하여 거절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에서는 조선을 침공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 침공의 적당한 시기를 얻기까지는 계속 부국 강병책으로 국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보다 강하여 정한론은 일단 후퇴되었다.

일본의 사정이 이와 같이 변화하고 있는데도 흥선 대원군과 국내 지도자들은 개화된 일본을 서양 오랑캐와 같다고 보고 계속해서 쇄국 정책을 강행하였다.

이에 반하여, 청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호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당시 청은 뻬이징 조약 이후 밀려오는 서구 열강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나라 안의 저항 세력이 여러 형태로 일어나고 있어, 안팎으로 어려운 일이 겹쳐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므로, 청은 조선에 대해 종래와 같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쇄국 정책을 강행하는 조선은 국제 무대에서 고립되었고, 개항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국면에 대응할 정치적 방안이나 제도적 개혁을 적극적으로 꾀하지 못하였다.

강화도 조약과 개항

조선은 오랫동안 지켜 오던 쇄국 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1876). 그런데, 침략적인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개항하게 되니, 결과적으로 열강 침투의 길을 열어 준 결과가 되어, 이후부터 우리 민족은 우리 역사에 일찌기 없었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쇄국 정책을 주장하던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일본은 미국 등으로부터 그들이 당한 전례를 모방하여 포함 외교를 펴, 사전 계획에 의한 운요오 호(雲揚號) 사건을 일으키고, 이어 군함과 군인을 강화도에 보내어 위협적으로 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폈다.

이 때, 정계에서는 아직도 개항 반대론이 거세었으나,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새로운 개화 세력이 형성되어 문호 개방의 움직임이 싹트고 있었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은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에서 해국도지(海國圖志)와 영환지략(瀛環志略) 같은 책을 구입하여 세계 정세를 국내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국왕 자신도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을 통하여 새로운 국제 관계와 정세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개화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화 사상이 미처 정책에 반영되지 못한 때에 일본의 침략적 교섭이 강요되어, 마침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전문 12조로 된 강화도 조약의 제1조에,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밖의 주요 내용으로는 사절을 교환, 상주하게 하고, 조약 체결 후 20개월 이내에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개항하며, 개항장에서 일본 상인의 무역과 조계(租界)의 설정 및 가옥 건축 등 거주의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이 조선 연해를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고, 양국의 민간 무역 활동에서 관리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그리고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범죄는 일본 영사에 의해 재판을 받는다는 치외 법권의 인정 등이었다.

그 후, 일본은 인천과 원산의 두 항구의 개항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통상 교역의 경제적 목적을 넘어, 한반도에 그들의 정치적, 군사적 거점을 마련하려는 침략 의도를 드러낸 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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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인천항 모습
옛날 인천항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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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국내 거주 일본인의 불법 행위에 대하여 조선의 사법권이 미칠 수 없게 되었다. 치외 법권, 해안 측량권 등은 조선의 자주권에 대한 결정적인 침해였다. 일본은 과거 그들이 개항할 때, 미국, 영국 등과 맺은 불평등 관계를 그대로 우리 나라에 강요하였던 것이다.

강화도 조약에 따라 일본과 다시 수호 조규 부록과 통상 장정이 마련되어, 조선 국내에서의 일본 외교관의 여행 자유, 개항장에서의 일본 거류민의 거주 지역 설정과 일본 화폐의 유통 등을 허용하였고, 일본의 수출입 상품에 대한 비과세 및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을 허용하였다. 이로써 우리 나라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의 발판이 용이하게 구축된 반면에, 조선은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전혀 취할 수 없게 되었다.

구미 제국과의 수교

일본에 의해 문호가 개방된 조선은 곧 구미 제국에도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신미양요에서 퇴각한 미국은,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맺자 다시 조선과의 수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 정부는 평화적인 수단으로 수교 교섭을 하도록 슈펠트(Shufeldt)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는 일본한테 알선을 요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무렵에, 러시아의 침략 위협에 따른 조선의 당면 외교 정책으로서의 연미론(聯美論) 등을 논술한 황쭌셴의 조선 책략(朝鮮策略)이 국내에 들어와 일부 지식층 사이에 읽혀졌고, 유교적인 이적관(夷狄觀)에서 벗어나 새로이 미국과 외교 교섭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한편, 슈펠트가 조선과의 수교 교섭을 꾸준히 추진하였으며,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이 조선에 침투하는 것을 견제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확인받을 틈을 엿보던 청이 알선에 나서서, 조선은 서양 제국 중 미국과 최초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1882).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는 양국 중 한 나라가 어려울 때에는 반드시 서로 돕고 거중 조정을 하도록 되어 있고, 치외 법권, 조차지 설정의 승인 및 최혜국 조관(最惠國條款) 등이 규정되어 있으며, 문화 교류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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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 수호 통상 조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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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이어서 영국, 독일과도 역시 청의 알선으로 수교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러시아는, 그들의 남하를 달가와하지 않는 청의 알선을 거치지 않고 조선 정부와 직접 수교 교섭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아크, 이탈리아 등과도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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