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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애국 계몽 운동

(5) 애국 계몽 운동

경제 자립 운동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 일제한테 침탈당하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애국 계몽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민족 산업을 육성하여 자립적인 경제 부강을 이룩하려는 경제 자립 운동과, 민족 의식을 높여 자주 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이룩하려는 민족 교육 운동이 중심이 되었다.

개항 이후, 일제를 비롯한 외국 상인 세력이 밀려오자, 이에 대항하면서 민족 자본을 육성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어, 서울, 원산, 부산, 인천 등 개항장의 상인들 중에는 상사를 조직하기도 하고, 운수업, 은행업, 광산업 등의 분야에서도 근대적인 경영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 능력이 약하고, 또 외국 자본에 밀려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경제 자립 운동의 하나로 전개된 것이 국채 보상 운동이었다. 이것은,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한 후 그들의 식민지 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한국의 모든 금융을 독점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 차관이라는 명목으로 1300만 원의 돈을 들여다 썼기 때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한 운동이었다. 한민족은 경제적인 독립부터 이룩하기 위해 이 빚을 스스로의 힘으로 갚고자 전국적으로 금연, 패물(佩物) 폐지 운동을 전개하여 거액의 돈을 모았으나, 일제의 방해로 말미암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운동에는 부녀자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신민회에서는 민족 산업의 육성을 위해 평양에 자기(瓷器) 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 조직을 전국에 확대하려고 하였다. 대구에 태극 서관을 창설한 것도 민족 산업을 육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사회 단체와 언론 활동

문호 개방 이후, 근대 과학 문명의 도입과 함께 구미의 사상과 학문도 선각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섭취되어, 정치, 언론, 종교, 문학 등 각 분야에서 계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초기 계몽 운동의 목표는, 밖으로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 민족의 자주 독립을 확립하고, 안으로 종래의 봉건적인 사상을 타파하여 자유, 평등의 민주적 근대 사회를 이룩하려는 데 있었다. 또 이 무렵, 태극기가 우리 나라 국기로 제정되어 애국심을 크게 북돋웠다.

정치 단체로는 독립 협회가 대표적이었으나, 그 밖에도 독립 협회의 영향으로 사회 단체, 여성 단체가 활동하였다. 그 후, 이와 같은 정치 계몽 단체는 정부의 탄압과 외세의 간섭으로 해산되기도 하였으나, 을사조약 이후 항일 구국을 목적으로 한 수많은 단체가 다시 결성되어 애국 계몽 운동을 주도하였다.

러⋅일 전쟁이 일어난 직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계기로 활동했던 보안회는 협동회로 이름을 고쳐서 강력한 구국 항쟁을 펴고자 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국 계몽 운동자들은 곧 공진회, 헌정 연구회 등의 정치 사회 단체를 조직하였고, 대한 자강회, 대한 협회 등으로 발전시키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전국적 규모의 구국 항쟁을 전개하였다.

통감부는 이러한 단체를 탄압하고자 보안법, 신문지법, 출판법 등의 악법을 만들어 탄압하는 한편, 그들의 앞잡이 단체로 일진회를 만들어 애국 계몽 운동을 교란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애국 계몽 단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활동하였으며, 나아가 비밀 단체로 신민회를 조직하여 보다 과감하게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에 큰 자취를 남긴 이 신민회는,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간부들이 많이 검거되어, 그 직접적인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은 박문국에서 간행한 한성 순보였으나, 이것은 관보에 시사를 곁들인 순간지에 불과하였다. 그 후, 서재필이 독립 신문을 간행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언론 활동이 전개되었다. 한글과 영문으로 간행된 이 신문은 국민의 대변지 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서구의 근대 사상과 학문을 전파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어, 남궁억 등에 의하여 황성 신문이 간행되었고, 이종일 등에 의하여 제국 신문이 간행되었다. 황성 신문은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는데, 장지연, 박은식, 주시경, 신채호 등 애국 계몽 사상가들의 논설이 특히 유명하였다. 제국 신문은 부녀자층을 대상으로 국민 계몽, 자강 사상을 고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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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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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이후는 일제 통감부의 탄압으로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었으나, 이런 속에서도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영국인 베델(Bethell)과 더불어 국문과 영문으로 대한 매일 신보를 간행하여 항일 운동의 선봉에 섰고, 또 손병희, 오세창 등은 만세보를, 대한 협회는 대한 민보를 간행하여, 일진회에서 만든 국민 신보 등과 대결하였다. 이 밖에도, 미국인 헐버어트가 월간지 코리언 레포지터리(Korean Repository)를 발간하여 한국을 외국에 소개하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였다.

민족 교육의 발달

근대 교육은 개화 운동의 일환으로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덕원 주민들은 개화파 인물들의 권유에 의하여 원산학사(元山學舍)를 세워 근대 학술과 무술을 가르쳤다(1883). 같은 해에 외아문 내에 동문학(同文學)이라는 영어 교습 기관을 세워 영어를 가르쳤다. 그 후, 정부는 육영 공원을 세우고(1886),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상류층의 자제들을 뽑아 영어를 비롯한 수학, 지리학, 정치⋅경제학 등 각종 근대 학문을 가르쳤다.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교육 입국 조서를 반포하고 근대 교육 제도를 마련하여 소학교, 중학교,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 의학교, 전무 학당, 농상공 학교 등 각종 교육 기관을 세웠다.

교육 입국 조서(일부)

교육은 그 길이 있는 것이니, 헛된 이름과 실용을 먼저 분별하여야 할지로다. 독서나 습자로 고인의 찌꺼기나 줍기에 몰두하여 시세 대국에 어두운 자는, 비록 그 문장이 고금을 능가할지라도 쓸모 없는 서생에 지나지 못하리라. 이제 짐은 정부에 명하여 널리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여 너희들 신민의 학식으로써 국가 중흥의 큰 공을 세우고자 하노니, 너희들 신민은 충군하고 위국하는 마음으로 너희의 덕과 몸과 지를 기를지어다. 왕실의 안전이 너희들 신민의 교육에 있고, 또 국가의 부강도 너희들 신민의 교육에 있도다.

근대적 교육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미국 등 외국 선교사들의 교육 기관 설립을 지원하여 배재 학당, 경신 학교, 숭실 학교 등이 세워졌고, 이화 학당, 정신 여학교, 배화 학당 등의 여학교와 더불어 서울의 양반 부인들이 중심이 된 순성(順成) 여학교도 세워졌다. 이와 같이 세워진 전국의 많은 사립 학교는 서양의 근대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 의식을 깨우쳐 주는 구실도 하였다.

한편, 1905년 이후 자주 국권을 수호하려는 애국 계몽 운동을 추진한 민족 운동자들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근대 교육이 민족 운동의 기반이며 본질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립 학교가 국내외 곳곳에 세워졌다. 이상설이 간도에 세운 서전 서숙(瑞甸書塾, 김약연이 후에 명동 학교로 개명)을 비롯하여, 이승훈이 정주에 오산 학교, 안창호가 평양에 대성 학교, 이시영이 간도에 신흥 학교(新興學校), 서울에 이용익이 보성 학교, 엄주익이 양정 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또, 2세 교육의 담당자이며 전국민의 절반에 해당되는 여성에 대한 교육이 국력 신장에 중요하다 하여 진명 여학교, 숙명 여학교, 동덕 여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성격의 민족주의 교육 기관은 전국에 5000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 무렵, 학술 연구를 통한 애국 계몽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어, 각종 학회와 교육 단체가 활동하였다. 이러한 것으로는 서북 학회, 기호 흥학회, 영남 학회, 호남 학회, 관동 학회와 같은 지방별 학회가 있었고, 흥사단, 대동 학회 등도 있었다.

국학과 신문학

근대 의식이 자라면서 교육열이 높아지고 민족 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국어에 대한 관심이 새로와지고 근대적인 역사 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더우기,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면서부터 이러한 경향이 보다 두드러졌는데, 이것은 민족 의식을 고조시키는 핵심이 되었다.

갑오경장 뒤에 정부에서는 편집국과 인쇄국을 두어 국한문 혼용의 교과서를 만들어 냈고, 그 뒤 국문 연구소를 세워서 주시경, 최광옥 등으로 국어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서구의 신문물을 소개한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새로운 국한문체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고, 이봉운의 국문 정리를 비롯하여 지석영의 신정 국문, 주시경의 국어 문법, 유길준의 대한 문전이 나오면서 국문 정리와 국어의 새로운 이해 체계가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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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의식과 전통 문화에의 자부심은 국사 연구와 고전 간행에 업적을 쌓아 근대 계몽 사학을 성립시켰다. 특히,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등은 한국사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신채호는 독사신론 등을 써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려 하였다. 그리고, 최남선은 박은식 등과 광문회를 만들어 민족의 고전을 정리,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또, 이 당시에 일제 침략에 대하여 민족 독립 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으로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애국 부인전 등의 구국 위인의 전기와 월남 망국사, 미국 독립사, 이탈리아 건국 삼걸전 같은 외국 흥망사, 오수불망(吾讐不忘) 같은 항일 저작물이 간행되었다.

문학면에서는 고전 소설에서 신문학으로 옮아가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나 순 한글로 쓴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신소설의 주제들은 아직 옛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봉건적인 윤리 도덕의 배격과 미신 타파를 주장하고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하여 계몽 문학의 구실을 하였다.

신소설에는 이인직의 혈의 누, 귀의 성, 안국선의 금수 회의록, 이해조의 자유종, 모란병, 최찬식의 안의 성, 추월색 등의 작품이 있다.

또, 최남선은 신체시를 발표하여 현대시의 형식을 처음 개척하였고, 이와 전후하여 천희당 시화(天喜堂詩話)가 대한 매일 신보에 게재되어 민족시의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독립가, 권학가, 한양가 등 창가도 나왔고, 서양 음악이 도입되어 군악대가 조직되고 애국가도 제정되었다. 그 중에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애국가는 국민 사이에 애창되어 독립 의식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한말 애국가의 한 종류

작자 미상

대조선 건양 원년 자주 독립 기뻐하세.

천지 간에 사람되어 진충 보국 제일이니,

임금께 충성하고 정부를 보호하세.

인민들을 사랑하고 나라기를 높이 달세.

나라 도울 생각으로 시종 여일 동심하세.

부모 경대, 자식 교육 사람마다 할 것이라.

권학가(勸學歌)

안창호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벽상(壁上)의 괘종(掛鐘) 소리 들어 보시오.

한 소리 두 소리 가고 못 오니,

인생의 백 년 가기 주마(走馬) 같도다.

신문학의 발달과 더불어 외국 문학의 번역물도 나타났다. 성경, 천로역정과 같은 크리스트 교 계통의 책과, 이이솝 이야기, 로빈슨 표류기, 걸리버 여행기 등의 문학 작품도 유행되었다.

신극 운동도 일어나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고, 은세계, 설중매, 치악산 등의 작품이 상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경향들은 일부 외국 문화에 대한 분별 없는 수입, 소개를 곁들여 식민지 문화의 터전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러한 것 중에서 심한 것은 일본이 정책적으로 추진한 일본 문예의 소개와 보급이었다.

종교 활동의 변화

종교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국면이 열려,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 오던 천주교가 자유로이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새로이 개신교도 전래되어 많은 발전을 보았는데, 종교 단체들은 전도 사업의 방편으로서 학교를 세우고 의료 기관을 만들어, 교육 사업과 사회 봉사에 기여하였다.

한편, 외래 종교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싹튼 동학도 동학 운동 때 큰 탄압을 받았으나, 손병희 등의 노력에 의하여 재건되어 농민 사이에 교세를 확장해 갔다. 그러나, 러⋅일 전쟁을 전후해서 이용구 등이 일제와 손을 잡고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친일적 성격을 띠자, 손병희는 이와 결별하고 천도교(天道敎)로 개명하여, 동학의 정통을 계승하고 민족 의식을 강조하는 종교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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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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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철, 오기호 등은 우리 민족의 단군 신앙을 발전시켜 대종교(大倧敎)를 창립하였다(1909). 대종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없지 않았으나, 민족적 입장을 강조하는 종교 활동을 벌여 항일 민족 운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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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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