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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근대 사회의 성장
  • 3. 3⋅1 운동과 대한 민국 임시 정부
  • (2) 3⋅1 운동 이전의 독립 운동

(2) 3⋅1 운동 이전의 독립 운동

항일 비밀 결사의 조직

한국이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것은 그들보다 근대화에 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랜 민족 문화와 전통에 바탕을 둔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은 독립 국가 건설의 달성을 기약하고 있었다. 을사조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파급된 애국 계몽 운동은 1910년 이후에도 줄기차게 국내외에 확산되었다.

이 이후의 민족 운동은 특히 도시의 중산층과 개화 지식층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유림까지 포함한 그들은 국내에서 헌병 경찰 통치의 위협 속에서도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으며,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전국에 걸쳐 민족주의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 민족 운동자들은 독립 의군부, 광복회, 조선 국권 회복단, 국민회, 자립단, 선명단, 조선산직 장려계, 민단 조합 등의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각종 선언문, 고시문, 격문을 통하여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으며, 민족 문화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하여 광복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불어넣어 국민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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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의군부 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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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회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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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의 사립 학교와 서당, 천도교와 크리스트 교, 불교, 대종교 등 교육 및 종교 조직을 통하여 교사와 학생, 그리고 뜻있는 종교인들은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민족의 광복을 찾기 위한 독립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그들은 일제 식민지 경제 정책으로 착취당하고 있던 농민과 노동자들과도 연결하면서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 운동 기지의 건설

1910년대에 민족 운동자들은 국내에서의 독립 운동과 연결하면서 국외에서도 각지에 독립 운동 기지를 설치하고, 그 곳에 이주하여 살고 있던 우리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착실하게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해외 독립 운동의 선구적 임무를 담당한 단체는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당시 의병 전쟁과 함께 항일 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었는데,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양기탁 등 수백 명의 민족 운동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민족주의 교육의 실시, 근대 의식의 고취, 민족 산업의 육성, 민족 문화의 계발, 선양 등을 목표로 민족 운동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신민회는 국내에서의 애국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자, 그 활동을 위하여 국외의 독립 운동 기지 설정에 앞장 서서 지역과 인물을 물색하였다. 독립 운동 기지 설치는 간도와 연해주 등지에 한민족의 집단적 거주 지역을 개척, 확장하여 항일 독립 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민족적 기반을 이루는 데 뜻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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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한국인 마을
간도의 한국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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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토대를 이룩하고, 청소년을 모아 근대적 민족 교육과 군사 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한민족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수행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 가운데 유명한 기지는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등이 설치한 간도 삼원보와 이상설, 이승희 등이 세운 밀산부 한흥동이었다. 이 기지를 거점으로 다수의 민족 교육 기관과 독립군을 양성할 무관 학교가 설립되었다.

1910년대 초에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에 수립됨으로써 독립군의 무장 항일 운동의 터전이 마련되었을 뿐 아니라, 임시 정부 탄생의 단서를 열어 놓았다.

한편, 중국, 일본, 미국, 유럽 등지에도 민족 운동자들이 망명하여 그 곳의 한국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힘찬 독립 운동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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