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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3⋅1 운동과 대한 민국 임시 정부
  • (4)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

(4)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

독립 운동의 중추 기구

국내에서 벌어진 3⋅1 운동은, 그 결과로 국외이긴 하나 상하이에 정통 정부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것은 1910년 이래의 정부 공백 상태를 메웠다는 의미에서 한민족이 일제에 의한 민족 수난기에 민족사적 정통성을 회복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정부는 군주제를 벗어난 공화 정부로서, 민주 국가의 성격을 띠었으며, 민족 지도자들의 근대적 정치 의식이 확대되고, 새 시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임시 정부는 민주 공화제의 정부로서, 국내외의 독립 운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임무를 담당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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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임시 정부 요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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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정부는 원래 1910년대 초에 수립될 듯하였으나 성립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3⋅1 운동 이후 여러 곳에서 정부 수립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상하이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에서의 한성 정부, 시베리아의 대한 국민 의회, 서⋅북간도의 군정부 등 여러 갈래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전 민족을 이끌고 보다 강력한 독립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통합된 정부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임시 정부의 헌정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각지의 임시 정부가 하나로 통합된 뒤,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근대적 임시 헌법을 갖추고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 정부는 임시 의정원과 국무원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민주 공화 정체의 정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대한 민국 임시 헌장 선포문

인민 일치(人民一致), 중외 협응(中外協應), 한성에서 의(義)를 일으킨 이래 30여 일 간에 평화적 독립을 3백여 주에 선언하고, 국민의 신의로써 완전히 조직한 임시 정부는 항구히 자주 독립의 복리를 아(我) 자손 여민(子孫黎民)에게 세전하기 위하여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의 결의로써 임시 헌장을 선포함.

대한 민국 임시 정부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군주제 체제를 버리고 민주 국가의 공화제적 체제로 세워진 것은 1880년대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 주창했던 개혁 정치의 염원이 이 시기에 와서 이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임시 정부의 헌정적 지도 체제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수립 이후 5차에 걸친 개헌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제1차 개헌은 대통령 지도제로서 대통령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 뒤 6년 만인 1925년, 이에 불합리한 점이 있어 제2차 개헌을 통하여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 지도제로 전환하였다가, 2년 뒤인 1927년에 제3차 개헌을 통하여 국무 위원 중심제인 집단 지도 체제로 변경한 후, 14년간 계속되었다. 그 뒤, 1940년에 제4차 개헌을 통하여 주석 중심제인 주석 지도 체제로 전환하여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다가 1944년에 제5차 개헌을 통하여 주석⋅부주석 중심 체제로 전환,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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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의정원 기록
임시 의정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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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운동의 전개

임시 정부는 그 초기에 전체 독립 운동자들의 동조를 얻지 못하여 국민 대표 회의가 소집되는 등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1925년에 김구가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정부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의 중국 침략에 따라 10여 차례에 걸쳐 중국 각지로 이동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빼앗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임시 정부의 연통제는 국내외를 연결하는 행정 체계로, 이것은 정통 정부의 기능을 발휘한 비밀 조직망이었다. 연통제의 실시 2년 만에 전국의 도⋅군⋅면에는 독판, 군감 등의 비밀 행정 조직이 만들어져, 한민족은 누구나 이 조직을 통하여 독립 운동에 가담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국내의 한국인은 이 조직을 통하여 임시 정부와 연락할 수 있었고, 군자금도 전달할 수 있었다.

군자금은 만주의 이륭 양행이나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임시 정부에 전달되기도 하였다. 또, 애국 공채의 발행으로 모금하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각지에서 독립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독립군에 전달되어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또, 임시 정부는 교통국의 통신망을 통하여 국내외를 연락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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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공채
애국 공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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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외교 총장으로 선임된 김규식을 전권 대사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게 하였다.

또, 국제 연맹에의 호소나 태평양 회의에 국내외 국민의 독립 열망을 전달하는 운동도 전개하였으며,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시켰다.

임시 정부는 기관지로 독립 신문을 간행, 배포하고,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으며, 밖으로 한국의 자주성과 우월한 민족 문화를 인식시키고, 안으로 민족의 독립 의식을 고취시켜 조국의 광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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