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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국사 4차(하)
  • Ⅱ. 근대 사회의 성장
  • 4. 독립 운동의 새 단계와 민족 문화의 수호
  • (1) 독립 운동의 강화

(1) 독립 운동의 강화

일제의 고등 경찰 통치

한민족의 거족적인 3⋅1 운동은 일단 일제의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한민족의 단결력에 놀라고, 또한 악화된 국제적 여론에 부딪히게 된 일본은 식민지 정책에 대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문화 정치라는 기만적인 통치 방식으로 식민지 정책을 전환한 것은 이와 같은 절박한 이유에서였다. 그 내용은 회유와 가장된 유화 정책을 통해 한민족을 이간하고 분열시키며, 그들의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수단이었다.

일제는 지금까지 육⋅해군 대장으로 조선 총독을 임명, 파견하던 것을 고쳐 문관도 그 자리에 임명할 수 있게 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다.

또, 조선 일보와 동아 일보 등의 민족계 신문의 발행을 허가함과 동시에 교육의 기회를 확대해 준다는 이른바 문화적 통치를 구호로 내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기만 정책의 구호였을 뿐, 실은 소수 친일 분자를 키워 한민족을 이간,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의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의 학문과 기술 교육을 통해 일제의 수탈에 도움이 될 인간을 키워 내기 위한 것이었다.

1945년, 일제가 한국에서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고, 보통 경찰로의 이행은 헌병 경찰이 제복만 바꾸어 입은 데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의 수와 장비 그리고 그 유지비는 3⋅1 운동 이전보다 몇 배로 증가하였다. 한글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였다 하나 검열이 철저하게 강화되어 삭제, 압수, 정간을 마음대로 하였다.

식량의 수탈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자본주의의 기반을 급속하게 키울 수 있었던 일제는, 고도 성장을 위하여 한반도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그들은 공업화 정책에 따라 생산이 부족하게 된 식량을 한반도에서 착취하려는 이른바 산미 증식 계획을 짜서 이를 한국 농촌에 강요하였다. 1920년부터 15년 계획으로 추진된 이 식량 수탈 계획은 무리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계획했던 증산량을 달성하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미곡 수탈량은 목표대로 수행되었다. 이 계획이 중단된 1933년만 보더라도 일제는 한국의 증산량을 훨씬 초과한 양을 수탈해 갔다.

미곡 생산량과 일본의 수탈량(단위 : 만 석)
연도 생산량 수탈량
1920 1,270 185
1922 1,432 340
1924 1,517 475
1926 1,497 544
1928 1,730 742
1930 1,370 540
1932 1,590 760
1933 1,630 870

이 결과, 한국의 농민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다가 농촌을 떠나 만주로 새 삶의 터전을 찾아 유랑의 길을 떠나거나 화전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쌀을 수탈당할 뿐만 아니라 증산에 투입된 수리 조합비, 비료 대금, 곡물 운반비 등도 착취를 당하여 농민은 이중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민족 실력의 양성

3⋅1 운동은 우리에게 독립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용기를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독립이 쟁취될 수 없다는 새로운 반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부응하여 문화와 경제 방면에서 민족 역량의 배양을 촉진하는 노력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교육 부문에서는 식민지 교육에 맞서 근대 교육을 발전시켜 갔는데, 국민의 자각이 높아짐에 따라 취학자가 날로 늘었으며, 사립 학교, 강습소, 야학, 서당 등이 세워지거나 보강되었다. 특히, 조선 교육회의 설립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으로 구국적인 민족주의 교육의 기풍이 일어났다. 언론 기관의 다양한 활동은 근대적 저어널리즘을 일으켜 대중 사회에 근대 의식을 심어 주었고, 근대 정치 의식을 키워 주었다.

3⋅1 운동에 크게 기여한 천도교에서는 제2의 3⋅1 운동을 계획하였고, 신문, 잡지, 단행본 등으로 신문화 운동을 일으켰다. 대종교도 이 시기에 정신 문화 운동을 일으켰으며, 크리스트 교나 불교도 근대 의식 고취에 앞장 섰다. 주체적으로 혁신된 원불교가 개간 사업과 저축 운동을 전개한 것도 민족의 역량을 배양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자주 독립 선언문

존경하는 천도교인과 민중 여러분!

우리 대한은 당당한 자주 독립국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의 으뜸 국민임을 재차 선언합니다. 지난 기미년의 독립 만세 운동은 곧 우리의 전통적인 독립의 의지를 만방에 천명한 것이고, 국제 정세의 순리에 병진하는 자유, 정의, 진리의 함성이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무력적인 압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자주 독립 운동은 가슴 아프게도 꺾였읍니다.…(중략)…우리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이제부터가 더욱 의미가 있고 중요합니다. 뜻맞는 동지끼리 다시 모여 기미년의 감격을 재현하기 위해 재차 일어나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선언합니다.…(후략)

〈1922년 3월 1일에 3⋅1 운동을 재현하려는 취지로 작성되었다.〉

경제 부문에서도, 민족의 실력을 육성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은 민족 기업의 육성과 민족 자본의 형성에서 가능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김성수 등은 경성 방직 회사를 창설하여 국산품의 애용을 강조하였으며, 민족 자본 육성에 앞장 섰다.

각급 학생들의 자작회 운동에 이어 조만식 등에 의한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되었고, 물산 장려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194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자급 자족, 국산품 장려, 소비 절약, 금주, 금연 등의 실천 요강을 내걸고 민족 경제 수호를 위해 나섰다. 청년회, 소년단, 기생 조합에서도 지지, 호응하여 민족 운동으로 성장되었으나, 일제 식민지 경제 정책에 휘말려 민족 경제 발전은 더디기만 하였다.

물산 장려회 궐기문

내 살림 내 것으로.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거의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제일 세상에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을 오늘에야 우리는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 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여 살고서 볼 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써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조선 사람, 조선 것.

독립 운동의 확대

1920년대에는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와의 대립 속에서 독립 운동은 그 진로 모색에 어려움이 있었다. 3⋅1 운동 이후 민족주의자들은 독립 투쟁을 강화하고자 한때 사회주의계와 연결하였다. 그러나, 그들 사회주의자들 내에서 심한 파쟁이 벌어졌고, 또 그들은 민족 독립보다도 세계의 공산화를 최종의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민족 독립을 지상 과제로 투쟁하는 민족주의자와의 연결은 혼선만을 초래하였다. 독립 투쟁의 이러한 혼선을 극복한 것은 6⋅10 독립 만세 운동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었다.

6⋅10 독립 만세 운동은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난 만세 시위 운동이었다(1926). 그것은 3⋅1 운동의 후속적인 거족적 항일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한⋅일 학생간의 민족 감정의 폭발로 일어난 대규모의 항일 학생 운동이었다(1929). 이 운동은 다음 해까지 계속되었는데,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 합세하여 전국적인 규모의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였다.1) 이 때 참가한 학교는 194개교로서, 총 54,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였고, 이 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은 582명, 무기 정학을 당한 학생은 2330명, 경찰에 체포된 학생은 164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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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생 운동 기념탑
광주 학생 운동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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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국내외에서는 의사들에 의한 독립 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는데, 김원봉 등의 의열단과 김구 등의 애국단의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다. 이들에 의한 제국주의자의 암살, 착취 기관에 대한 폭탄 세례, 군자금 조달 등의 활동이 잇달았다. 나석주의 동양 척식 주식 회사 투탄 의거, 이봉창의 일본 천황 암살 미수 의거, 윤봉길의 홍코우 공원 의거, 조명하의 타이쭝(臺中) 의거는 그 대표적 예이다.

사회⋅경제적 독립 운동

한편, 단일화된 민족 운동을 위한 노력이 계속 추진되어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합작하여 신간회를 조직하였다(1927). 뒤이어 여성들에 의하여 신간회의 자매 기관적인 성격을 띤 근우회가 조직되었다. 학생 운동에 자극을 받은 이들 단체는 식민 통치에 대항하는 민족 운동을 일으키거나 여성의 애국 계몽 운동도 함께 전개하였다.

신간회는 이상재 등 지식인 30여 명의 발기로 서울에서 발족되었다. 민족의 단결과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자를 배격하는 등의 신생활 운동과 함께 일제에 항거하는 의욕을 북돋웠다. 김활란 등이 중심이 된 근우회 역시 이 같은 취지와 방향에서 여성의 단결을 통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교묘한 탄압과 사회주의계의 배신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식민지 경제 정책으로 직접적 수탈의 희생 대상이 되었던 농민과 노동자들은 소작 쟁의, 노동 쟁의 등의 운동을 일으켜 그들 나름의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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