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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무장 독립 전쟁

(2) 무장 독립 전쟁

독립 전쟁의 방향

3⋅1 운동은 거국⋅거족적인 독립 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 전개가 급선무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민족 운동자들은 무장 독립 운동의 지역적인 잇점을 고려하여 만주나 간도, 그리고 연해주 일대를 무장 세력 육성의 기지로 삼았다. 따라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100여만 명의 한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국권의 침탈을 전후로 하여 독립 운동 기지화가 꾸준히 추진되어 무장 독립군을 편성하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는 항일 단체가 많이 등장하였다.1) 192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에서는 대한 독립단,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대한 독립 군비단, 의군부, 광복단, 태극단, 광한단,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총영, 대한 통의부, 광정단 등의 독립군이 설립되었으며, 연해주에서는 혈성단, 의군부, 경비대, 신민단 등이, 미국에서는 국민 군단, 비행사 양성소, 소년병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천마산대, 보합단, 의용단, 구월산대 등의 독립군이 설립되어 일제에 항전하였다.

이들 독립군들은 3⋅1 운동 이후 일제와의 독립 전쟁을 최대의 목표로 삼아 편제를 재정비, 강화하고, 무장을 갖추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와서 일제 군경과의 항전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수많은 청년이 만주와 간도, 연해주 등지로 건너가 독립군에 가담하였다. 이와 같은 무장 독립 전쟁은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

무장 독립 전쟁을 추진하려는 정신으로 자원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이 편성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간도, 연해주 일대에 적지 않게 포진하고 있었다. 1920년대를 전후로 해서 간도에서는 국민회군, 북로 군정서군,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군, 대한 의용군, 광복군 총영 등의 독립군 부대가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교전을 하면서 군자금 조달, 밀정 살해, 일본인 암살, 독립 정신 선양 등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눈부신 전과를 기록한 것은 홍범도가 거느리는 대한 독립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이 거느리는 북로 군정서군의 청산리 대첩이었다. 봉오동 전투에서는 대한 독립군이 독립군 본영을 기습해 온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와 합세하여 봉오동으로 유인, 포위, 공격하여 500여 명을 살상하였다(1920.6.).

이에 대하여 일본군은 한국 내에 주둔한 부대와 관동 지방에 파견된 부대 및 연해주 지역에 출동한 부대가 동, 서, 남 세 방향에서 공격하여 왔다. 독립군은 일본군 연대 병력 이상을 청산리 80리 계곡으로 유인, 4일간 격전 끝에 일본군 3300여 명을 살상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1920.10.). 이것이 청산리 대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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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 때 사용된 독립군의 무기
청산리 대첩 때 사용된 독립군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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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독립군의 항전을 식민지 통치의 큰 위협으로 여겨, 독립군은 물론, 그 기반을 동요시키고 보복할 흉계를 꾸며, 만주에 사는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2) 간도 지방에서 일본군에 의하여 학살된 한국인은 훈춘현에서 242명, 연길현에서 1124명, 화룡현에서 572명, 왕청현에서 347명, 영안현에서 17명이었으며, 간도 지방에서는 804명이었다.(1920).

독립 전쟁의 고난

일본군은 청산리 대첩 등 독립군의 승리로 사기가 충천해 있던 만주의 한민족에 대해 대량 학살과 촌락의 방화, 약탈, 파괴를 자행함으로써, 독립군은 일시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들은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 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한 뒤 노령으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그 곳에서 약소 민족을 지원한다는 적색군에게 배신당하여 무장 해제까지 당하는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그러나, 실의를 디디고 일어선 독립군은 재정비에 나섰고, 힘의 조직화를 위하여 통합 운동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압록강 대안에는 임시 정부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가 성립되었고, 길림(吉林, 지린)과 봉천(奉天, 선양)을 중심으로 정의부가 성립되어 남만주 일대에서의 한민족의 행정부로 발전하였다.

또, 북만주 일대에서는 자유시 참변 이후 노령에서 되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로 하여 신민부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주의 여러 독립군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셋으로 통합되었다. 이들은 각기 그곳 한민족의 자치를 집행하는 민주적인 형태의 민정 기관을 두어 헌장을 제정하여 입헌적 정치 조직까지 갖추었다. 그리고,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맡은 군정 기관도 아울러 구비하였다. 이들은 여러 번 회합을 거듭하여 국민부로 통합되었다(1928). 그 후, 이를 중심으로 무장 독립 전쟁은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에 앞서, 일제가 독립군의 탄압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만주의 군벌 장쭤린과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의 사이에 현상금을 건 이른바 미쓰야 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여 중⋅일 공동 작전하에 독립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그 곳의 민족 지도자들은 적대시하지도 않은 중국 군경에게 체포되어 일본에 이첩되는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큰 타격을 받았으나, 만주에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생길 때까지 일본 군경과의 항전이 계속되었다. 그 중 일부는 만주 사변(1931) 이후 만주의 일본 세력에 반대하는 중국군과 한⋅중 연합군을 결성하여 각지에서 줄기차게 항전하였고, 만주가 일제의 수중으로 떨어진 뒤에는 중국 대륙이나 연해주로 분산되었다. 이 때, 중국 본토로 들어간 독립군은 뒤에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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