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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독립 운동의 새 단계와 민족 문화의 수호
  • (4) 민족 문화의 수호

(4) 민족 문화의 수호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로 급속하게 발전한 일본은 192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 공황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하나로 묶는 경제 블록을 이루어 한반도의 노동력과 자원을 약탈하는 경제 정책을 쓰게 되었다. 조선 수력 전기 회사나 질소 비료 공장의 설립은 이러한 착취를 위한 기초적인 투자였다. 뒤이어 만주를 점령하고(1931)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였으며, 나아가 중⋅일 전쟁(1937)을 도발하여 대륙 침략을 강행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고자 공업화 정책을 쓰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군수 공장이 세워지고 광산이 개발되었으나, 이것은 그들의 전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결국 한반도에 대한 수탈을 도와 식민지 경제로의 예속성만 더해 가는 결과가 되었을 뿐이었다. 대륙 침략에 광분한 일제는 미국과 영국에 도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도발자가 되었다. 일제는 전쟁을 위하여 총동원령을 내리고, 한국에서의 인적, 물적 수탈을 강화하였으며, 민족 말살책을 강구하였다.

한민족은 일제의 내선 일체, 일선 동조론, 황국 신민화 같은 허망한 구호 밑에서 우리말 교육과 우리 역사 교육을 금지당하였으며, 황국 신민의 서사, 궁성 요배, 정오 묵도 등 그들의 미신적 행위까지 강요당하였다. 이에 항거하는 학교는 폐쇄당하였고,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크리스트 교 신자는 투옥당하였는데, 순교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리고, 창씨 개명으로 우리의 성명마저 일본식 이름으로 고치도록 강요당하였다. 또, 일제는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하여 식량과 각종 물자를 수탈해 갔을 뿐 아니라, 우리 청년을 전선으로 몰아 내기 위해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더니, 마침내는 징병제로 바꾸어 일본, 중국, 인도차이나, 남양 군도 등지로 강제 동원하였고, 여자들까지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삼기도 하였다.

한편, 노동력을 착취하고자 장정들을 전쟁터나 군수 공장에 징용으로 끌어들여 위험한 노동 조건 속에서 노예와 같이 혹사하여 수많은 장정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국학 운동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강화는 문화 각 방면에도 미쳐 전통 문화의 창조적 계승, 유지에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뜻있는 문화⋅예술인은 한국 전통 문화의 수호와 발전을 민족 운동의 기본 문제로 인식하고 이에 헌신하였다.

일본은 한국을 연구한다는 미명하에 각종 문화재를 마구 발굴하였고, 한국사를 왜곡, 서술하기 위하여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조선사라는 그릇된 역사책을 편찬하였다.

이와 같은 식민지 문화 통치를 통하여 한국 문화의 우수성, 창의성, 독창성 및 자율성을 외면한 채, 부정적이고 파쟁적인 면만을 부각시켜 한민족이 열등 의식과 우리 역사에 환멸을 느끼도록 조작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의도적인 한국 문화의 왜곡에 한국의 지식인들은 탄압을 무릅쓰고 학문 활동을 통한 항쟁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3⋅1 운동 이후 이윤재, 최현배 등 국어학자들은 한말의 한글 연구를 계승하여 조선어 연구회를 이은 조선어 학회를 조직하여 우리말을 갈고 닦았다. 그들은 한글날과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고, 강연을 통하여 한글을 보급하였으며, 한글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그 연구 성과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 준비 등 이 방면에 큰 성과를 쌓았다. 그러나,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말미암아 조선어 학회 회원은 투옥되거나 순국하는 이까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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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학회 회원
조선어 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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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문화를 수호하려는 노력은 한국사 연구에서도 나타났다. 일찌기 국사 연구에 정진하였던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은 민족주의 사관을 정립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알찬 연구 성과를 보여 주었다. 박은식과 신채호는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면서 국사 연구와 저술에 열중하였다. 박은식은 한국 통사, 한국 독립 운동지 혈사,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정인보는 조선사 연구 등의 저서를 서술하여 식민 사관에 대항하였다. 문일평, 안재홍 등도 국사 연구와 한국 고전의 개발과 보급에 공헌하여 민족 문화를 수호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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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과 한국 통사
박은식과 한국 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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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청구 학회를 중심으로 한 일본 어용 학자들의 왜곡된 한국 연구에 반발하여, 조윤제, 이병도, 손진태, 신석호 등은 진단 학회를 조직하여 진단 학보를 발간하면서 한국학 연구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1940년에 조선어 학회 등 각종 단체와 언론 기관에 탄압이 가해져 진단 학회도 활동을 정지당하였다. 한편, 일본이 탈취해 가는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형필과 고유섭은 미술품을 수집, 연구하여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문예 운동

한국의 근대 문학은 일제의 식민지 체제 때문에 자유로운 발전이 억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하에서도 저항적이고 자주 사상을 고취하는 문예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새로운 소설과 신체시를 발표하여 현대 문학의 선구자로서 계몽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한용운, 신채호, 김소월, 염상섭 등은 우리 문학을 전통적인 문학의 바탕 위에서 현대 문학으로 승화, 발전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들은 님의 침묵, 꿈의 하늘, 진달래꽃, 삼대 등의 작품을 통해 한민족에게 자주 자립의 신념을 북돋워 주었다. 김동인, 박종화, 현진건, 채만식, 심훈, 이상, 이상화, 김유정, 이육사, 윤동주 등도 민족의 애환과 저항 의식을 담은 작품을 발표하여 민족 의식을 일깨웠다.

문학 활동은 3⋅1 운동 이후에 보다 활발해져 창조, 폐허, 백조 등의 동인지와 개벽, 조선 문단 등의 종합 잡지가 간행되었는데, 이러한 잡지들은 국내의 독립 운동의 사실도 발표하여 일본의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문학 활동은 식민지적 현실을 극복하는 데에 노력하여 새로운 문학의 기반과 사조를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대 중반에는 신경향파 문학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문학도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세련된 미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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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좌)와 백조(우)의 표지
창조(좌)와 백조(우)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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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분야에서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와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가 배출되었고, 미술에서는 안중식 등이 한국의 동양화를 전승, 발전시켰다. 서양화 역시 이중섭 같은 화가가 배출되어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한편, 연극에서도 토월회와 같은 신극 단체들이 연극을 통한 계몽 활동을 폈다. 그 밖에, 방정환과 조철호의 소년 운동과 문학 활동은 내일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애국심을 북돋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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