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4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4차(하)
  • Ⅲ. 현대 사회의 발달
  • 1. 대한 민국의 정통성
  • (1) 대한 민국의 성립

(1) 대한 민국의 성립

민족의 광복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광복을 찾았다. 한국 민족의 광복은 연합국의 승리가 가져다 준 결과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꾸준히 전개한 독립 전쟁과 그 열의의 결과라고 하겠다.

세계 제패를 노리고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라는 망상을 안고 침략 전쟁에 나섰던 일본은, 1943년 6월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자, 급격하게 전력이 약화되었다.

더우기 그 해 8월 초, 일본은 두 지역에 세계 최초의 원자탄 공격을 받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 즈음,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참전하자, 일본은 연합군측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광복을 맞이한 한민족은 태극기를 휘두르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이것이 곧 완전 독립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굳게 믿고 기뻐하였다. 우리는 국내외에서의 민족의 독립 전쟁과 외교적 노력에 의해 완전한 독립 국가가 달성되리라 기대하였던 것이다.

확대보기
민족의 광복
민족의 광복
팝업창 닫기

국토의 분단

이보다 앞선 카이로 회담(1943.11.)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3거두는 공동 선언을 통하여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키며,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고 세계에 선포하였다. 이 결의는 포츠담 선언(1945.7.)에서 재확인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독립은 기정 사실화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대국의 미묘한 이해 관계로 인하여 곧 실현되지 못했다.

연합군은 국토 분단의 비극을 초래한 군사 경계선에 대해 합의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남겨 놓은 채 38도선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각기 진주하였다.

남북한에서는 우리의 독립 의지와는 상관 없이 미군과 소련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어, 독립을 열망하던 온 국민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민족을 격분시킨 것은 5개년 간의 한국 신탁 통치안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결정에 대하여(1945.12.) 우리 국민은 결연히 일어나 맹렬한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전통과 능력을 무시한 이러한 결정에 온 국민은 분노하였으며,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반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확대보기
반탁 운동의 확대
반탁 운동의 확대
팝업창 닫기

처음에는 북한 공산주의자들까지 반탁 운동에 참가하여(1946.1.) 민족적 단합의 계기가 마련되는 듯싶었으나, 소련의 사주를 받은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민족적 양심을 외면한 채 찬탁을 외쳐 국민의 빈축과 실망을 샀다.

한국 문제가 온 국민의 반탁 운동으로 난국에 부딪히자, 그 후 한국 문제를 해결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그러나, 소련측이 찬탁을 주장하는 단체들만으로 정부를 수립하기를 고집하여, 모든 정치 단체의 참석을 주장하는 미국측의 주장과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결국 미⋅소 공동 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다.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민족의 자주적 발전이 억제되어 온 가운데 광복을 맞이한 우리 민족은, 어지러운 국제 정세의 변동 속에서 신속하게 대처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더우기, 광복 이후에는 여러 가지 익숙하지 못한 정치 의식의 바탕이 사회,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에 그대로 반영되어 혼란이 계속되었다.

특히,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민족을 분열시키는 행동은 더욱 사회 질서를 어지럽혔다. 이와 같이, 독립 정부를 세우려는 우리 민족의 앞에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한편, 얽혀 돌아가는 20세기 중반의 세계사의 회오리 속에서 한국의 문제는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한 문제였다. 즉, 한반도의 문제는 한민족의 소망과 노력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어서 세계적 대책이 필요하였다.

한국의 독립 문제는 미⋅영⋅중⋅소의 4개국 외상 회의에 상정되었으나, 모스크바 회의의 합의 사항이 아니라는 소련의 거부로 해결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는 다시 유우엔 총회에 상정되어, 9개국으로 구성된 유우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설치하고, 유우엔 감시하에 한반도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조속히 통일 독립 정부를 수립시키자고 제안되었다.

이 제안은 한국의 적화 통일을 희망하는 소련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대 다수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 임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북한 지역에서의 선거 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유우엔은 소총회를 개최하여,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민족의 독립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북한의 의석을 남겨 놓은 채 5월 30일 제헌 국회가 소집되었고, 3⋅1 독립 정신을 계승하는 민주 헌법을 제정하여 7월 17일에 내외에 공포하였다.

확대보기
제헌 국회 개원식 광경
제헌 국회 개원식 광경
팝업창 닫기

제헌 국회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행정부가 구성되어 8월 15일 대한 민국의 성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확대보기
정부 수립 경축 행사
정부 수립 경축 행사
팝업창 닫기

한편, 그 해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유우엔 총회에서 48대 6이라는 절대 다수로 대한 민국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공인받게 되었고, 이어서 개별적인 승인이 뒤따라 자유 우방 50여 개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대한 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