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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현대 사회의 발달
  • 1. 대한 민국의 정통성
  • (2) 6⋅25 남침

(2) 6⋅25 남침

북한의 공산화

유우엔 총회는 유우엔 한국 임시 위원단에 대치하여 유우엔 한국 위원단을 새로 창설하고, 통일과 대의 민주 정치의 발전 및 외군 철수 등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대한 민국 정부와 협의하도록 결의하였다.

이 때, 북한과 소련은 외군 철수, 통일 정부 수립 등 선전적인 구호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며,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을 방해해 왔다.

그러나, 한국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자유 우방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대한 민국은, 안으로는 광복 이후 혼란된 사회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하며, 악화된 경제를 개선하려 노력하는 한편, 밖으로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적화 통일을 위한 침략 음모를 분쇄하면서 발전의 기반을 닦아 나갔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대한 민국의 이와 같은 발전을 막기 위하여 김일성을 내세워 소련의 괴뢰 정권을 만들고, 북한 땅에 세계에 그 유례가 드문 혹독한 독재 통치를 실시하였다.

그들은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수립된 대한 민국에 정치적 공세를 폈다. 그들은 소련과 손잡고 그들로부터 각종 군사 원조를 받아 급속히 군사력을 강화하여, 20여만의 중무장한 10여 개 전투 사단을 편성하면서 남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막강한 군비로 전시 체제를 굳히고, 대한 민국의 헛점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대한 민국에 대해 위장 평화 공세를 펴, 대한 민국 국민을 안심시키고 환심을 사려는 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공산 집단의 남한 교란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대한 민국 내의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취약점을 이용하여 교란 작전을 폈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을 사주하여 제주도 폭동 사건과 여수⋅순천 반란 사건을 일으켰다.

제주도 폭동 사건은, 북한 공산당의 사주 아래 제주도에서 공산 무장 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였다.

공산당들은 도민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한라산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후, 우리 나라는 군경의 활약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은 제주도 폭동과 마찬가지로 대한 민국을 혼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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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충혼비
경찰 충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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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들은 탄약고, 병기 창고를 파괴하는 한편, 관공서,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과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이에 국군은 그들을 토벌하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것은 6⋅25 남침 약 2년 전의 일이었다.

이러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교란 작전은 그 후에도 여러 가지로 나타났으나,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해결되었다.

6⋅25 남침과 공산군 격퇴

무력으로 남한 적화를 달성하겠다는 야욕으로 가득 찬 공산주의자들은 겉으로는 평화 공세를 펴면서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반도가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등 미국의 일관성 없는 정책에 고무되어, 급기야는 소련과 중공의 지원 아래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일제히 38도선 전역에 걸쳐 불법적인 남침을 개시하여 동족 상잔의 비극을 일으켰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대한 민국 국군은 빈약한 무기를 가지고 조국 사수의 결의를 다짐하면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도 작전상 일시 후퇴하여 낙동강 저지선까지 갔다. 그리하여, 이 곳을 거점으로 반격 작전을 세워 북진의 준비를 하였다.

특히, 이 때 나이 어린 학도병들도 조국 수호를 위해 전선에서 국군과 함께 용감히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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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의 참전
학도병의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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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남침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대한 민국 전역을 차지하려는 영토적 야욕을 가진 소련의 사주를 받아 일으킨 전쟁이다.

김일성은 이 같은 소련의 음모에 따라 준비해 온 군사력을 동원하여 기습 남침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에 대하여 유우엔은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고 공산군의 남침은 불법이며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 행위라고 규정하고, 한국 지원을 결의하였다. 동시에 유우엔 군을 파견하여 북한 공산 집단의 침공을 저지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등 16개 우방국이 유우엔의 이름으로 참전하여 국군과 함께 각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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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반격
국군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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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과 유우엔 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고비로 9월에는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10월에는 38도선을 돌파하여 국군이 평양을 수복하였으며, 그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 앞에는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10월 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투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아군은, 겨울을 이용하여 실시된 공산군의 반격으로 한때 한강 이남까지 후퇴하였으나, 다시 반격 작전을 전개하여 물리쳤다.

휴전 반대와 전후 복구

일진 일퇴가 거듭되는 속에서 전쟁의 불리함을 안 공산군측은, 소련의 유우엔 대표를 통하여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남침을 당한 지 1년여 만에 맞은 이 같은 휴전 제의는, 국토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휴전하게 되면 국토의 분단이 계속될 것이므로, 이를 염려한 한민족은 휴전 반대 범국민 운동을 전국적으로 일으켰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 통일의 민족적 숙원을 풀어 주도록 호소하였다. 그러나, 통일을 바라는 한민족의 휴전 반대의 국민적 열망을 무시한 채 휴전 교섭 2년 만인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되었다.

세계의 자유와 평화에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졌던 6⋅25 남침은 3년간 계속되어 인명과 재산상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남침 중에 사상자와 전재민은 약 150만 명에 달하였고, 국토는 초토화되었으며, 건물, 도로, 공장, 발전 시설 등 모든 산업 시설은 방화, 파괴되었다. 동시에 남북 간의 대립은 더욱 날카로와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희망은 더욱 멀어졌다. 이와 같은 큰 희생을 치르고도 남북 통일의 과제는 단서를 잡지 못한 채 남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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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대한으로 넘어오는 북한 동포
자유 대한으로 넘어오는 북한 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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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과 동시에 대한 민국은 황폐된 국토의 재건과 부흥을 서둘렀다. 미국 등 자유 우방도 이를 도왔다. 복구 사업은 국민적 참여와 열의에 의해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생산 활동도 급속히 활발해졌다.

따라서, 교통, 통신, 운수 기관이 점차 개선, 발전되었을 뿐 아니라, 시멘트, 전력 등 기간 산업 시설도 갖추어져 경제 발전의 기틀이 잡혀 갔다.

한편, 미국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여 앞으로 어떠한 외부의 침략에도 상호 협조하고 대항할 수 있는 공동의 준비를 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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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상호 방위 조약
한⋅미 상호 방위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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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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