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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Ⅱ. 고대 사회의 발전
  • 2. 고대의 정치와 그 변천
  • (1) 정치적 발전과 중앙 집권화

(1) 정치적 발전과 중앙 집권화

고구려의 발전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발전하였던 고구려는, 2세기 후반에 이르러 체제의 중앙 집권화와 왕권의 강화에 새로운 진전을 가져왔다. 종래 부족적 전통의 5부가 행정적인 5부로, 왕위 계승은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다.

4세기 초에 고구려는 낙랑을 쳐서 중국 세력을 우리 나라에서 몰아 내는 데 성공하였다(313). 그러나 그 후 북으로부터 전연, 남으로부터 백제의 침략을 받아 국가적인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극복되고 국가 체제를 크게 개혁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소수림왕 때의 일이었다. 당시, 불교의 수입, 태학의 설립, 그리고 율령의 반포 등은 바로 중앙 집권 국가로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소수림왕 때의 체제 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 때에는 국력을 밖으로 팽창시켜, 그 시호의 의미처럼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요동 방면을 포함한 만주의 대부분의 지역이 고구려의 판도가 되었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압도하고, 신라를 도와 남해안 일부 지역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당시의 활발한 정복 사업에 대해서는 국내성에 세워진 광개토 대왕릉비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정복 활동은 중국의 정세를 이용하여 침략의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고자 하는 방어적인 의미를 아울러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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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릉 비문의 탑본(부분)
광개토 대왕릉 비문의 탑본(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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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장수왕 때에는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여 고구려 발전의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하였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안으로는 왕권 강화의 계기가 되었고, 밖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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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전성(5세기 장수왕 때)
고구려의 전성(5세기 장수왕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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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발전

백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 이 때, 백제는 영토를 크게 확장, 마한의 남은 영역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공격하였다. 동시에, 낙동강 유역의 가야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오늘의 경기, 충청,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 황해도의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또, 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 지방을 점령하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에까지 진출하는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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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발전(4세기 후반)
백제의 발전(4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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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세기 후반,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큰 타격을 받아 그 중심 지역인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도읍을 오늘의 서울 지역에 위치한 한성으로부터 금강 유역의 웅진으로 옮겼다(475). 웅진 천도 이후 백제는 왕권이 약화되고 지배 세력이 교체되면서, 국력의 쇠퇴와 더불어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이 다시 회복된 것은 무령왕 때였다. 그리하여 다음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도모하게 되었다. 백제가 국호를 남부여라 고치고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긴 것은 이와 같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때의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활발한 교류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앙 관서 및 지방 제도를 강화함으로써 새로운 국가 발전을 도모하였다.

신라의 발전

신라가 중앙 집권 국가로서 비약적 발전을 시작한 것은 6세기 초부터였다. 수리 사업과 우경법에 의하여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정치 체제도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법흥왕 때에는 율령이 반포되고, 정치 제도로서 병부 및 상대등 제도가 새로 설치되는 등 정치 조직이 강화되었다.

신라의 발전은 곧 영토의 확장 과정이었다. 법흥왕 때 김해의 금관 가야를 병합(532)한 이후, 진흥왕 때에는 신라의 대외적 발전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 때의 신라는 고구려의 점령지였던 한강 유역을 비롯하여 가야의 근거지인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고, 북으로는 함경도 지방에까지 이르렀다. 신라의 팽창은 삼국 통일에 중요한 토대를 닦은 것이었다.

단양의 적성비와 창녕,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의 여러 순수비,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울진 봉평 신라비는 모두 6세기의 신라 발전과 관련된 기념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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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 신라비
울진 봉평 신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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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상호 항쟁

삼국은 국가 발전 과정에서 서로 동맹하여 협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호간의 경쟁과 싸움이 계속되었다. 5세기 이후, 삼국 간의 항쟁은 대략 세 시기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제1기는 전진(前秦) 등 북중국과 우호 관계를 맺은 고구려가 소수림왕 때에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잡은 5세기이고, 제2기는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고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는 6세기이며, 제3기는 신라가 수⋅당과 연결하여 삼국을 통일하기까지의 7세기이다.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은 중국의 후연 등을 격파하여 만주 지방을 확보하는 한편, 남쪽으로는 백제를 치기도 하고, 신라를 도와 낙동강 유역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정복 활동은 주로 요동 지방을 비롯한 만주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후,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427) 백제, 신라에 대한 압박을 본격화하게 되자, 상호 항쟁은 가열되었다.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 지역까지 장악하게 되자, 위기 의식을 느낀 백제, 신라 양국은 동맹 관계를 강화하여 고구려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였다. 충북 중원의 고구려비는 이 시기의 고구려 세력 확장을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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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고구려비
중원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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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가 힘을 합하여 고구려를 밀어 내고 한강 유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 것은 6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때, 신라는 회복한 지역을 독점, 이를 일방적으로 신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120년간이나 지속되던 양국의 동맹 관계는 깨어졌다.

신라는 진흥왕 때 화랑도의 제도를 통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한편, 국력을 정복 사업에 집중시켰다.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중부 지방을 확보하였으며, 그 세력은 함경도 지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특히, 한강 유역의 장악은 삼국 항쟁의 주도권이 신라로 옮겨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신라는 황해를 통하여 직접 중국과 연결함으로써 외교적인 공세까지 강화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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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영토 확장(6세기,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 확장(6세기, 진흥왕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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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대외 관계

삼국이 발전해 가던 시기의 중국은 위, 촉, 오의 삼국 및 남북조의 분열기를 거쳐 수⋅당의 통일 왕조에 이르는 시기였다.

삼국 시대에는 주로 중국의 침략 세력에 대하여 맞서 항쟁하였다. 특히, 국경을 직접 접하고 있던 고구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고구려는 중국 한 군현과의 대립 항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마침내는 이들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위, 전연 등의 침입으로 한때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중국 세력의 압력을 밀어 내고, 광개토 대왕 이후로는 동아시아의 대제국 건설에 성공하였다. 고구려의 전성기에 중국은 여전히 분열 상태에 있었고, 이와 같은 사정을 잘 이용하여, 고구려는 남북조와 외교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중국 세력을 교묘히 견제하였다.

백제는 그 발전 과정에서 요서, 산둥 지방까지 진출하여1) 중국의 요서 등지에의 백제 세력의 진출에 대해서는 송서, 양서와 같은 중국의 기록에 그 사실이 나타나 있다. 그 시기는 대략 4세기경으로 보며, 백제의 대외 무역 발달과 관련된 세력 확장의 한 양상으로 추측된다. 그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하였으며,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로는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삼국은 중국의 내부적 대립과 분열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그들의 압력을 견제하면서도 국가 발전을 위해 중국 문화의 섭취에는 개방적이었다.

삼국 중 왜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나라는 백제였다. 이는, 다수의 백제 유이민이 규슈 지방 등지에 진출하여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보관 중인 칠지도라는 칼은 백제 왕이 왜왕에게 선물한 것으로서, 양국의 친교 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백제는 이와 같은 관계를 바탕으로 왜군을 한반도에 끌어들여 삼국 항쟁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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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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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 중국 전쟁

6세기 말,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이 수에 의하여 통일되자, 고구려는 그 압력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는 먼저 중국의 요서 지방을 공격하여 수의 압력을 예방하고자 하였다. 이에, 수의 문제와 양제가 연이어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특히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으로 살수에서 수의 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612). 이로써 고구려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였지만, 반면에 수나라는 침략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로 곧 망하고 말았다.

수에 이어 당이 일어나자, 고구려는 국경 지방에 천리 장성을 쌓으면서 침략에 대비하였다. 더욱이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독재 정치가 이루어지면서, 당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다(645).

당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점령하고, 이어서 안시성을 포위하였다. 안시성에서는 군⋅민 모두가 힘을 합쳐 60여 일 간이나 용감히 당군과 맞서 싸웠다. 그 사이에 고구려군이 전면적인 공격의 기세를 보이자, 당 태종은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가 중국의 통일 제국인 수⋅당의 침략을 잇달아 격퇴한 것은 중국과의 대립을 통한 발전의 한 모습이었으며, 아울러 백제, 신라까지 보호하는 민족 수호의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삼국의 통일

6세기 진흥왕 때 신라의 비약적인 팽창은 삼국 간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즉, 백제와 신라의 동맹 관계가 깨어진 대신,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에 압력을 가하는 상황으로 정세가 바뀌었던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양면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는, 이에 중국의 통일 왕조인 수⋅당과의 연결을 꾀하게 되었다.

고구려 정벌이 실패한 이후 기회를 엿보던 당은 곧 신라와 손을 잡았다.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이르렀고,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금강 하류로 침입하였다. 마침내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은 함락되고 말았다(660).

백제를 멸한 후, 나⋅당 연합군은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면서 고구려의 국력이 약화되자, 나⋅당 연합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평양성도 함락되고 말았다(668).

백제와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의 군사적 침략에 의해 멸망하였지만,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 지배층의 향락적 생활로 인해 백성들이 일체감을 상실함으로써 쇠퇴하고 있었다.

백제, 고구려의 멸망 이후, 각처에서 나라의 부흥을 도모하는 항전이 전개되었다. 주류성, 임존성은 당시 백제 부흥 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고구려의 유민들도 한성(재령)을 근거지로 나라의 부흥을 도모하였으나, 이러한 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7세기 말에 이르러 발해가 건국됨으로써 고구려의 전통은 계승될 수 있었다.

백제, 고구려가 무너지게 되자,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를 두고, 다시 고구려 점령 이후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 도독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에 신라는,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의 대당 전쟁은 백제 지역의 주둔군을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어서 고구려 지역에까지 확산되었다. 당나라 역시 신라의 공격에 맞서 침략군을 계속 투입하였기 때문에 치열한 전투는 여러 곳에서 벌어졌다. 신라는 매소성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일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도 당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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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전쟁
나⋅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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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과 그것이 대동강 이남의 통일에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사실은 삼국 통일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삼국 통일은 민족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고구려, 백제 문화 전통의 수용과 경제력 확충으로 민족 문화는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통일 신라의 왕권 강화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그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대외 관계가 안정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삼국의 통일을 전후하여 초래된 중요한 정치적 변화 현상은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무열왕은 김유신의 후원을 받아 진골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라 경쟁자들을 실력으로 물리치고, 백제, 고구려에 대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 때의 전제 왕권 확립은 이후 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과 관계가 깊다.2) 삼국사기에는 태종 무열왕 이후 혜공왕에 이르는 120여 년 간(654~779)의 시기를 중대라 하여, 그 이전의 상대, 이후의 하대와 구별하고 있다.

한편, 통일을 전후하여 유교 정치 이념이 도입되고, 중앙 집권적 관료 정치가 발달하였으며, 왕실의 권위가 높아짐으로써 왕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문무왕 때의 통일 왕국 형성, 그리고 신문왕 때의 귀족 세력 숙청 작업도 전제 왕권의 확립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신문왕 때에는 이와 같은 배경에서 정치 제도와 지방 조직, 군사 제도 등을 정비함으로써 전제 왕권의 확립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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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암
대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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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은 왕권에 눌려 약화되었다. 이에 비하여, 6두품은 신분상의 제약으로 높은 관직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신라 하대 사회의 동요

무열왕 직계 자손들의 전제 왕권은, 혜공왕 때에 와서 방계 귀족의 반란으로 몰락하였다. 이 때부터 하대 약 150여 년 간 신라 조정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전개되어 왕이 자주 교체되었으며, 웅천주 도독 김헌창의 반란과 같은 지방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크게 약화되었다.

진성 여왕 이후에 와서는 정치가 더욱 문란해져서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잇단 천재 지변으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에 살기 어려워진 농민들은, 귀족이나 사원의 노비로 전락하거나, 각처에서 초적이 되어 도둑질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고구려나 백제의 부흥을 내세우면서 저항하였다.

이 때에 최치원 등 6두품 지식인들은 신라 사회의 폐단을 시정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의 수립을 시도하였지만, 탄압당하거나 배척당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능력 중심의 과거 제도와 유교 정치 이념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중앙 진골 귀족들은 아직도 골품 제도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의 불교나 화랑도에서 항상 강조해 오던 국가 정신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만을 유지하려 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지나친 향락과 과중한 수취가 농촌 사회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으므로,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한 지방 세력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발해의 성립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을 무렵, 고구려의 옛 땅에서는 고구려를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마침내 발해가 건국되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특히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고구려인은 당나라에 대하여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 때문에, 당은 그 곳의 고구려 유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임명하였고, 친당적인 소고구려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이와 같은 민족 분열 정책은 오히려 고구려의 유민들에게 동족 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구려의 장군 출신 대조영은 요동 지방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멀리 동쪽으로 옮겨, 길림성의 돈화현 동모산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698). 처음에는 국호를 진(震)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곧 발해이다. 그리하여 남쪽의 신라, 북쪽의 발해가 함께 존재한 남북국의 형세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해의 영역에는 고구려인 이외에, 원래 고구려 지배하에 있던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로써 발해의 주민은 지배 계층을 형성한 고구려인과 피지배층의 말갈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인을 주축으로 성립된 나라였던만큼, 고구려 계승 의식이 분명하였다. 이 점은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도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발해의 발전

발해는 건국 이후, 체제가 정비되고 국력이 신장되면서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에 걸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특히, 8세기 초에는 당과 대결하면서 영토를 확장하여 국가 기반을 확실히 하였다. 당시의 발해 형세에 대하여 중국의 역사책에서는 “동북 지방의 여러 민족들이 두려워 복종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발해는 초기에 당과의 대결을 통한 국가 영역의 확보에 주력하였지만, 8세기 후반에는 대대적인 지배 체제의 정비에 힘을 모았다. 동시에, 당과 친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 문화를 수입, 문화의 발전에 이용하였다. 수도를 중경으로부터 상경으로 이동한 것도 국내 지배 체제의 정비, 발전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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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상경 용천부 터
발해의 상경 용천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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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에 이르러 발해는 크게 융성하였다. 이 무렵, 영토는 더욱 확장되어 그 이름을 널리 떨쳤으며,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방 행정 조직도 정비되었다. 이로 인하여 선왕 때 발해는 해동 성국이라는 칭호를 듣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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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영역
발해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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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역사에 있어서 주목되는 것은 인안, 대흥, 건흥 등 독자적 연호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은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대등한 지위를 강조한 것이며,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강대함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료 조직의 성격 및 왕위 계승에 있어서 장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던 사실과 관련하여 볼 때, 발해 역시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대외 관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처음에는 당과의 무력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8세기 초에 발해가 국력을 떨치며 영토를 확장하자, 이에 불안을 느낀 당은 흑수부 말갈족을 이용하려 하였다. 이에 발해는, 흑수부를 치는 한편, 수군으로 하여금 산둥 지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발해는 당과 신라의 공격을 양면으로 받았지만, 이를 격퇴하면서 국가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발해의 대당 관계는 8세기 후반 이후 화친책으로 전환되면서 당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였으며, 많은 유학생들이 당의 빈공과에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당의 문물이 수입되고, 무역도 매우 활발하였다.

발해는 당, 신라의 협공으로 인한 고립을 탈피하기 위하여 일본과는 끝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체로, 신라와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하였으나, 때에 따라서는 사신도 교환되고, 무역도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만주 지역에서 그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던 발해는 10세기 초에 국력이 약화되면서 거란족에게 멸망되었다(926). 이 때, 고구려 계통의 유민들은 대개 고려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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