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사회의 출발

고려의 건국은 고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한 중세 사회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새 사회의 건설을 위한 노력은 태조 때에 이미 본격화되었다. 태조의 개혁 정책은 세 가지 원칙 아래에서 추진되었다.

첫째, 나말 여초에 걸쳐 가혹한 수취와 오랜 전란에 시달리고 있던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백성에 대한 수취를 줄이고, 백성들이 생업을 편히 누리게 하기 위하여 가급적 전쟁을 피하였다.

둘째, 신라 때의 골품제에 대신하여 각 지역, 각 계층의 정치 세력을 포용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폐쇄적인 낡은 질서를 배제하고, 능력 본위의 개방적 사회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셋째, 고구려 계승 이념에 토대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북방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북진 정책은 이후 사회의 변화와 국제 관계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정신이 일관되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의 정치 현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호족 세력을 어떻게 편제하여 통합을 굳건히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왕실이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거나, 호족 상호간의 결혼을 장려하는 등 정략 결혼의 방편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제를 정비하면서 많은 호족들을 중앙의 관리로 수용하였다. 이와 아울러, 지방 호족에게 지방 자치의 책임을 맡게 하는 동시에, 그 자제들을 인질로 하여 수도에 와 있게 하였는데, 이를 기인이라 하였다.

한편, 태조는 자손들에게 훈요 10조를 남겼다. 훈요 10조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여 연등 행사를 성대하게 하고, 민족의 전통적 제전인 팔관회를 열도록 하였는데, 이는 불교와 재래의 관습을 중시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여 왕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중세 사회의 성격

고려의 건국으로 중세 사회가 성립되었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징표를 찾아볼 수가 있다. 고려 사회는 고대 사회와는 모든 면에서 확실히 다른 구조를 보여 주고 있었다.

첫째, 사회적 지배 세력으로 지방의 호족 세력이 대두하였다는 점이다. 고대 사회의 모순을 체험한 지방의 호족들은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여, 중앙의 진골 귀족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를 개혁하는 데 앞장 섰다. 사회가 점차 안정되면서 호족들은 자신들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신분 체제를 마련하였으니, 이른바 문벌 귀족 사회의 형성이 그것이다.

둘째, 유교적 정치 질서가 중시되었다. 6두품 계열의 유학자들이 고려의 정치에 직접 참여하면서 골품제의 조직 원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유교 정치 이념이 정립되었다. 이를 토대로 하여 마련된 정치 제도는, 신분제적 관념이 강조되었던 신라의 정치 제도에서 보다 진전하여 행정적 기능이 중시되었다. 그리고 통치 체제를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교육 제도와 과거 제도를 정비하였다.

셋째, 문화의 밀도가 크게 높아진 중세 문화를 발달시켰다. 고려의 문화는 신라 때의 고대 문화의 모순을 극복하였고, 중국과도 다른 독자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즉, 혈족적 관념과 종교의 테두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남으로써 문화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고, 선진적인 송의 문화를 수용함에 있어서도 모방적 단계에서 벗어나 독특한 개성을 보여 주었다. 또, 지방의 호족들이 문화의 주인공으로 참여하면서 지방 문화의 성격이 보다 뚜렷해졌다.

넷째, 강력한 민족 의식이 사회를 이끌었다. 고대 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극복하였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은 곧 새로운 문화 의식을 가지게 하였고, 이를 토대로 하여 강력한 민족 의식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민족 의식은 고구려 강토의 회복, 그리고 북방 민족과의 항쟁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이와 같이, 나말 여초의 사회 변동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이었다. 더구나 그 변동은 외세의 간섭 없이 자체 내에서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