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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중세 사회의 발전
  • 2. 중세의 정치와 그 변천
  • (3) 대외 관계의 변천

(3) 대외 관계의 변천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

고려의 외교 정책에 있어서의 기본 방향은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이었다. 이러한 외교 정책은 중국 사회의 변화에 상응하여 신축성 있게 전개되어 갔다. 고려가 건국할 즈음, 중국 북부에는 거란족의 세력이 강성하였는데, 송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송과 거란이 충돌하게 되었다. 이 무렵, 고려와 송은 서로 제휴하여 거란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므로, 거란은 송과 친교를 맺고 북진 정책을 시도하는 고려를 항상 경계하였다.

한편, 발해가 망한 뒤에 그 유민들은 일찍이 고구려가 일어났던 압록강 중류 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우고, 동진하는 거란족과 북진하는 고려 사이에서 자체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송과 자주 왕래하였으므로, 거란을 한층 더 자극하게 되었다.

거란의 침입과 격퇴

거란은 국호를 요(遼)라 하고, 먼저 정안국을 토벌한 다음,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였다. 제1차 침입 때에는 서희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하여,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강화하고, 강동 6주(江東六州)를 설치하여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요와의 적극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자, 요의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왔다. 이 제2차 침입에서는 방어하던 강조가 패하여 개경까지 함락되었으나, 양규가 귀주에서 거란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 뒤, 소배압이 이끈 10만 대군의 제3차 침입도 개경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고려군의 협공을 받아 후퇴하다가,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어,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에 지나지 않았다. 이 승리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1019).

거란은 그 뒤에도 자주 침입을 시도하여 국경 방면에서 충돌이 계속되었으나, 고려는 그 때마다 이를 격퇴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송, 요 삼국 간의 국제 관계가 세력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고려는 국방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강감찬의 주장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았다. 그리고 덕종 때부터 북쪽 국경 일대에 장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압록강 어귀에서 시작하여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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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와 천리 장성
강동 6주와 천리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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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고려는 거란에 이어서 여진족의 압력을 받았다. 12세기 초에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의 추장이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그들은 고려에 손을 뻗쳐 마침내 정주에서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기병인 여진족의 군대를 보병만으로는 방어하기가 곤란하였으므로, 숙종은 신기군이라는 기병 부대를 중심으로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하였다. 이어서, 예종 때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함경도 쪽으로 진격하여,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았다(1107).1) 윤관은 여진족을 내쫓고 그 지역에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숭녕진, 통태진, 진양진의 성을 쌓고, 적극적인 영토 확장책의 일환으로 사민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길주 지방설과 두만강 유역설 등이 있다. 이리하여 고려의 영토는 북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생활 터전을 잃은 여진족의 계속되는 침입으로 9성을 수비하기가 곤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조공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9성의 반환을 애원해 왔고, 또 서북쪽에는 거란 세력이 있었으므로, 동북의 여진 토벌에만 전 국력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결국 9성을 쌓은 지 1년 만에 이를 여진족에게 돌려 주고 말았다. 그 후, 여진족은 세력을 강화하여 만주 일대를 장악한 다음,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고려에 압력을 가해 왔다. 이로 인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금에 대한 외교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고려와 몽고의 접촉

최씨 정권이 안정되어 갈 무렵, 금나라에서는 거란족이 내란을 일으킨데다가, 칭기즈칸이 통일한 몽고 세력이 진출하여 만주 지역은 매우 어수선하였다.

이 무렵, 몽고에 쫓긴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하여 왔다. 이들은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제천 방면에서 김취려에게 대파하여 물러갔고, 다음에 다시 침입해 왔으나, 고려군의 반격을 받아 북쪽으로 쫓겨 가다가 강동성에서 포위당하였다. 이 때, 고려는 북쪽에서 거란족을 추격하여 온 몽고 군대, 두만강 지역에 있던 동진국(東眞國) 군대와 연합하여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이것이 고려와 몽고의 첫 접촉이었다.

몽고와의 전쟁

몽고는 거란족을 토벌해 주었다는 구실로 고려에게 공물을 강요하였다. 그 뒤,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몽고 사신이 국경 지대에서 피살당한 사건이 일어나자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고, 몽고군의 장수 살리타가 군대를 이끌고 침입해 왔다(1231). 이 때, 몽고군은 의주를 점령하고, 이어서 개경을 포위하였으므로, 고려는 일단 몽고와 강화를 맺고 돌려 보냈다.

강화를 맺은 몽고가 무리한 조공을 요구해 오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몽고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몽고의 장수 살리타가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에서 고려의 승장 김윤후에게 사살되고 몽고 군대는 쫓겨갔다(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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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산성
강화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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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몽고는 금을 멸한 뒤에 여러 차례 고려에 침입해 왔다. 그 때마다 고려는 항쟁을 계속하여 몽고의 침입을 약 40년간이나 막아 냈다.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천민들이 용감히 싸워 줌으로써 관악산, 충주 등 여러 곳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계속되는 몽고의 침입으로 국토는 극도로 황폐해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또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소실되었다. 뿐만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외침에 대해 정부의 뚜렷한 대책이 없자, 민심은 최씨 정권을 떠나게 되어 4대 60여 년 간 계속된 최씨 무신 정권이 무너지는 한 원인이 되었다. 마침내 무신 정권이 무너지게 되자, 고려의 새 정부는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개경 환도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대는 배중손의 지휘하에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하여 진도로 옮겨 저항을 계속했으며,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하에 항쟁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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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성(삼별초군이 몽고군을 상대로 항쟁했던 성지. 전남 진도 소재)
용장성(삼별초군이 몽고군을 상대로 항쟁했던 성지. 전남 진도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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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성의 시련

고려는 몽고와 강화한 이후 자주성에 많은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 무렵, 몽고는 국호를 원으로 고치고, 중국을 통일한 후, 일본 원정을 꾀하였다.

고려는 원의 강요에 의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대를 징발당하였다. 여⋅원 연합군은 2차에 걸쳐 일본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태풍으로 인하여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어서, 고려는 영토의 일부도 빼앗겼다. 즉, 원은 고종 말년에 철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하여 화주에 쌍성 총관부를 설치하였으며, 원종 때에는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두었다. 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후에는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두어 경영하였다. 그 후, 동녕부와 탐라 총관부가 관할하던 지역은 충렬왕 때에 다시 찾았으나, 쌍성 총관부가 관할하던 지역은 공민왕 때에 와서 다시 찾았다.

한편, 고려는 관제에도 변화를 겪어야 했다. 즉, 원의 압력으로 격을 낮추어 중서 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6부를 4사로 통합하였다. 그리고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하여 개경에 설치하였던 정동행성을 그 뒤에도 존속시켰고, 감찰 기관인 순마소를 두었으며, 또 군관인 다루가치를 배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여⋅원 간의 관계가 확대되면서 문화와 풍속의 교류도 빈번해졌다. 그리하여 고려 사회의 본래의 모습이 변질되기도 하였다.2) 여⋅원 양국 간에는 귀족, 문인, 기술자, 상인들이 자주 왕래하여, 고려 상류 사회에서는 몽고어가 유행하고, 또 몽고식 이름을 가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몽고식 의복이나 풍속도 유행하였다. 그리고 몽고에서는 고려의 여자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으므로, 이로 인한 사회 문제가 일어났고, 또 조혼의 풍속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고려의 문화가 몽고에 소개되고, 고려 풍속이 몽고의 상류 사회에 유행되기도 하였다.

몽고 세력의 침입으로 고려는 각 분야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강인한 민족 정신이 토대가 되어 전통과 주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

원은 14세기 후반에 들어와, 각처에서 일어난 한족(漢族)의 반란으로 급속히 쇠약해져 갔다. 공민왕은 이 때를 이용하여 친원 세력인 기철 등을 숙청하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폐지하였으며, 쌍성 총관부를 공략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그리고 인당 등으로 하여금 요동 지방을 공략하게 하였으며, 원의 간섭으로 바뀌어졌던 관제를 복구하는 한편, 몽고풍을 없애는 등 반원적인 자주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원은 공민왕을 몰아 내기 위하여 고려로 침입해 왔으나 최영이 이를 격파하였고, 또 원의 장수 나하추가 동북에서 침입해 오자 이성계가 이를 격퇴하였다.

한편, 공민왕은 요동 땅을 수복하기 위하여 지용수와 이성계로 하여금 양면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 요양을 점령하고, 이 땅이 원래 우리 나라의 땅임을 선포하였으나, 뒤에 명의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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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영토 수복
공민왕의 영토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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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내에서는 권문 세족들이 정치를 좌우하는 한편, 원의 세력과 결탁하여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수탈을 함부로 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을 추진하던 신진 사대부 세력은 아직 미약하여 권문 세족과 대결할 만한 힘이 없었다.

공민왕이 반원 개혁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밖으로는 원의 세력과 싸워야 하고, 안으로는 권문 세족을 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원의 압력으로 왕권이 강화될 수가 없었고, 또 원을 배경으로 한 권문 세족들이 왕권을 견제하여 개혁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민왕 때 크게 진출한 신진 사대부 세력은 그 후 개혁을 꾸준히 추진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 왕조가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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