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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유학과 한문학

(1) 유학과 한문학

유학의 발달

고려 시대에는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채용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물들이 과거 제도를 통하여 문신 귀족으로 진출하게 됨으로써 유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태조는 최언위 등의 유학자들의 보필을 받았으며, 서경에 학교를 설치하여 유학을 장려하였다. 광종 때에는 유학에 능한 전문 관료를 기르기 위하여 과거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문한 기구를 더욱 정비하여 왕권 확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성종 때에는 국초의 내서성을 비서성으로 개칭하여 왕의 직속하에 두었다. 정부의 주도하에 유학이 장려되는 과정에서 향촌을 이끌어 가던 지방 세력가들도 중앙 관료로 흡수되었다. 이 무렵의 대표적인 유학자는 최승로와 김심언이었다. 이들 새로운 지식 계급들은, 사회를 개혁하고 새 문화를 창조하는 독자적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유학은 관념적이거나 사대적인 성격에 빠지지 않고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특성을 지녔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초기의 학풍은 점차 보수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11세기에 북진파의 대표적 인물인 왕가도 등이 물러난 후, 경원 이씨 일파가 집권함에 따라 유학의 학풍은 자주적인 유교 정신을 강조하기보다는 집권 세력의 안전만을 도모하는 보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문종 때의 대표적 유학자는 최충이었다. 그는 해동 공자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관직을 물러난 후에 9재 학당이라는 사학을 세워 유학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최충의 유학은 보수적 성격을 지녔으며, 당시 문벌 귀족 세력의 안전을 도모하는 입장에 섰다. 이후, 고려 중기의 유학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으나, 사회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보수적 유학의 성격을 대표한 인물은 김부식이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성행하였던 유학은, 무신 정변이 일어나 문신 귀족 세력이 몰락함에 따라 크게 위축되었다.

성리학의 전래

성리학은 원래 송의 주희가 완성한 것으로, 종래 한⋅당의 훈고학적 유학과는 달리,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심성 문제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새로운 학문이다. 이는 불교의 철학적인 사변을 유학에 접목한 것으로, 5경보다는 4서를 중시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리학이 고려에 처음 소개된 것은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서였다. 그 후, 백이정이 직접 원에 가서 배워 와 이제현, 박충좌 등에게 전수하였으며, 고려 말에는 이색,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이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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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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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수용된 초기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인 면보다는 일상 생활에 관계되는 실천적 기능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주희의 소학이 존중되었으며, 또 예속을 바로잡기 위해 주자가례가 권장되었다. 한편, 정도전을 비롯한 당시의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인륜에 어긋난다고 하여 불교 자체를 공박하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수용으로 종래의 훈고학적인 유학이 철학적인 유학으로 바뀌었으며,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가 쇠퇴하고 새로운 사상 체계인 유교가 성행하게 되는 등 사상계의 일대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서의 편찬

고려 시대에는 유학의 발달과 함께 유교적인 역사 서술 체계가 확립되어 많은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기록들이 불타 버렸으므로, 황주량에 의해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박인량은 고금록을 저술하였으며, 홍관은 속편년통재를 편찬하는 등 편년체의 역사 서술이 발달하였다. 그 후, 인종 때 김부식에 의해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다. 삼국사기는 기전체의 정사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유교적 역사 의식에 입각하여 서술한, 고려 중기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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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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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정변 이후, 사회적 혼란과 대몽 항쟁의 위기를 경험한 지식인들에 의해,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는 각훈의 해동고승전, 이규보의 동명왕편,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설화나 야사를 수록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보는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다. 제왕운기도 우리 나라의 역사를 단군으로부터 서술하였으며, 또 동명왕편은 동명왕을 고구려 건국의 영웅으로 칭송한 일종의 민족 서사시이다. 고려 후기에는 신진 사대부의 성장과 함께 다시 유교 사관이 발달하였다. 새로운 사학 경향을 띤 이제현의 사략 등에는 유교의 합리주의 사관이 반영되고, 정통 의식과 함께 대의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사관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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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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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시책과 교육 기관

고려 시대에는 관리를 양성하기 위하여 중앙과 지방에 많은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장려하였다.

태조는 건국 후 신라 계통의 학자들을 등용하고, 개경과 서경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성종 초에는 지방 관리의 자제들을 개경에 오게 하여 학문을 장려하였고, 나중에는 지방 12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보내어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고 중앙에 국자감을 두고, 지방 각 주현에 향교를 세워 교육에 힘썼다. 국자감은 유학을 비롯하여 율학, 서학, 산학을 교육하였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 최충의 문헌공도(9재 학당) 등 사학 12도가 융성하여 관학이 쇠퇴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관학을 진흥시키기 위한 여러 시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숙종 때에는 국자감을 강화하고자 서적포를 두어 도서 출판을 활발히 하였으며, 예종 때에는 관학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국학(국자감)에 7재라는 전문 강좌를 두어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예종은 관학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일종의 장학 재단인 양현고를 설치하였다. 인종 때에는 개경에 6학의 제도를 정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교육을 강화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안향의 건의로 양현고의 부실을 보충하기 위해 교육 재단인 섬학전을 설치하고, 국학에 대성전을 신축하였다.

과거 제도와 음서 제도

과거 제도는 광종 때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 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실시하였다(958). 고려의 과거 제도는 제술과, 명경과, 잡과로 나누어, 제술과는 한문학으로, 명경과는 유교 경전으로, 잡과는 의학, 천문, 음양 지리로써 시험하였다. 제술과와 명경과는 문신을 선발하기 위한 것이었고, 잡과는 기술관을 등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신을 등용하기 위한 무과는 거의 실시되지 못하였다.

한편, 고려 시대에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관리가 되는 음서 제도가 있었다. 공신 및 고위 관료의 자손은 음서를 통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었으며, 이들은 승진하는 데에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이 음서 제도는 고려 문벌 귀족 사회를 강화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고려 귀족 사회의 특징적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문학의 발달

고려 전기의 문학은 전시대부터 내려오던 향가와 한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광종 때의 균여는 대표적인 향가 작가로서, 현재 보현십원가 11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불교의 찬가로서, 신도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광종 이후, 과거 제도가 확립되어 문치주의 시대가 시작되고, 제술과가 중시되어 한문학이 성하게 되었다. 한문학은 귀족 사회의 필수적인 교양이 되었고, 일상 생활에서도 유교 경전의 문구가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그 결과, 고려의 한문학은 종래 중국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던 단계를 벗어나 점차 독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중기 이후에는 귀족 사회에 점차 사치와 향락적인 풍조가 심해졌고, 당⋅송의 한문학을 숭상하는 경향도 일어나게 되었다. 당⋅송 문학에의 심취는 전통 문화와의 괴리를 초래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당시 귀족 문화의 사대성과 보수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 신진 사대부의 대두로 문학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먼저, 향가의 형식을 계승한 경기체가가 등장하였다. 그 내용은, 주로 신진 사대부 계층의 생활상을 반영한 것으로, 한림별곡,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의 작품이 남아 있다. 그리고 고려 후기의 새로운 시가 문학으로 어부가가 있는데, 이는 처사적 문학이었다. 또, 장가 또는 속요라고 불리는 민중의 노래가 유행하였는데, 청산별곡, 쌍화점 등의 작품이 전한다.

한문학은 무신 정변 이후 고려 전기보다 세련되었으며, 주로 사대부 계층에 의해 발달되었다. 당시,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 수필 문학과, 임춘의 국순전, 이규보의 국선생전, 이곡의 죽부인전 등 사물을 의인화한 설화 문학이 등장하였다. 한편, 이인로는 세련된 한시를 지었으며, 이규보는 동명왕편에서 한문학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함으로써 새로운 문학 세계를 추구하였다.

동명왕편

…햇빛 받아 주몽 낳으니 이 때가 계해년, 골격이 특이하고, 우는 소리 또한 컸다. 처음에 알 낳으니, 보는 이 모두 놀라, 임금은 불길하다고 이것 어찌 인류될꼬. 말우리에 던져 두니 모든 말이 밟지 않고, 깊은 산에 버렸더니 온갖 짐승 지켜 준다. 어미가 거둬 길러 달포 되니 말을 하되, 파리놈이 눈에 덤벼 편안히 잠 못 자오. 활과 살을 지어 주니 백발 백중 하는구나.……

〈동국이상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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