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5차 교육과정
  • 고등학교 국사 5차(상)
  • Ⅳ. 근세 사회의 발전
  • 1. 근세 사회로의 전환
  • (1) 신진 사대부의 대두

(1) 신진 사대부의 대두

신진 사대부의 성장

무인 정권에 의하여 문벌 귀족 정치가 붕괴된 이후에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지방의 중소 지주층, 신분적으로는 향리 출신이 많았으며,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실무에도 능한 학자적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문벌에 힘입어 음서를 통하여 진출하기보다는, 학문적 실력을 바탕으로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리로 진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은 연고지에 소규모의 농장을 가지고 있는 중소 지주이거나 자영 농민들로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토지를 개간하거나 혹은 구매하여 농장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농장은 전호나 노비를 써서 경영하거나, 직접 경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대부들은, 권력을 배경으로 불법 수단에 의해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게 된 권문 세족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중앙의 정치 무대에 진출하였다 하더라도, 물러난 다음에는 향촌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기도 하였다.

고려 말에 새로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사대부들은 구질서와 권문 세족의 횡포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진취적 성향을 강하게 지녔다. 이들은 성리학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경륜을 더 넓힐 수 있었으며, 공민왕 때부터 교육 제도와 과거 제도가 재정비되면서 과거를 거쳐 중앙에 진출하여, 그들의 정치 이념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렇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 말에 이르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무인 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사회의 불안과 국가적인 시련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위화도 회군과 이성계의 집권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무인 세력이 성장해 가고 있었다.

원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홍건적은 공민왕 때 두 차례나 침입하여, 한때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안동까지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왜구의 침입은 그 피해가 더욱 커서, 오랜 동안 전국의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고려는 외교적 교섭으로 왜구의 창궐을 막아 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국방력을 강화하여 적극적으로 왜구의 토벌에 나섰다. 남과 북으로부터 침입해 온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은 전국 곳곳에서 이루어져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최영과 이성계는 대표적인 무장으로서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확대보기
홍건적⋅왜구의 격퇴
홍건적⋅왜구의 격퇴
팝업창 닫기

왜구의 토벌이 한창 진행되던 우왕 말년에, 고려와 명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났다. 명은 원의 쌍성 총관부 관할하에 있던 땅을 그들의 직속령으로 만들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왔다. 이에, 고려의 조정에서는 크게 분개하여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요동 정벌을 둘러싸고 조정의 의견이 갈라졌다.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측은 즉각적인 출병을 주장하였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측은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요동 정벌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출병을 반대하였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정벌군이 파견되었으나, 이성계 등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인 최영 등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 일파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명과의 관계를 호전시켜 나갔다.

전제 개혁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조민수, 이색 등의 주장에 의해서 옹립된 우왕의 아들 창왕마저 축출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껏 조준, 정도전 등의 신진 사대부들에 의하여 주장되었으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전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확대보기
조준의 전제 개혁안
조준의 전제 개혁안
팝업창 닫기

이들은, 우선 전국의 토지를 조사한 후, 종래의 공사 전적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새로운 토지 제도인 과전법을 공포하였다(1391). 과전법의 실시로 고갈된 국가 재정이 확충되고, 신진 관료들의 경제 기반이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피폐한 농민 생활을 개선시켜 주고, 국방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현직 관리뿐 아니라 전직 관리에게까지 과전을 지급한 것은, 전제 개혁으로 불만을 가진 구세력과 재야 세력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며, 사망한 관료의 자식과 아내에게도 토지를 지급한 것은 사대부를 우대하는 조치였다. 또, 과전법에서는 농민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신진 사대부들이 개혁 정치를 통해 농민의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 말에 계속되던 내우 외환에 대처해 싸운 농민들의 투쟁의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