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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Ⅳ. 근세 사회의 발전
  • 1. 근세 사회로의 전환
  • (2) 조선의 성립과 근세 사회

(2) 조선의 성립과 근세 사회

조선의 개창

고려 말기에는 권문 세족이 발호하는 가운데 중앙 집권적인 체제가 약화되고 왕권도 쇠퇴하였다. 이에, 중앙 집권의 강화와 관료 정치의 정비는 국왕과 사대부의 양면에서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공민왕은 권문 세족과 인연이 없는 승려 및 사대부와 제휴하여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우왕이 즉위하면서 권문 세족의 횡포는 오히려 더욱 심해져서 사대부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 신진 사대부는 점차 두 파로 갈라졌다. 즉, 고려 왕조의 테두리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파와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적극적인 혁명파가 서로 대립하였다. 이 때, 다수의 사대부들은 온건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 남은 등과 같은 혁명파는 신흥 무인 세력과 농민 군사들을 끌어들여 새 왕조 개창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들은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고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던 이성계1) 이성계의 조상은 무신 집권 초기에 고향 전주로부터 전전하여 동북면에 정착한 유이민이었다. 이 가문은 점차 여진인 사이에 세력을 얻어, 공민왕 때에 개경으로 진출하였다. 이성계는 그의 조상이 이룩해 놓은 강력한 세력 기반과 자신의 뛰어난 무예로 홍건적, 왜구 등의 격퇴와 동녕부 정벌에 혁혁한 전공을 세워, 마침내 우왕 말년에는 중앙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다.와 손을 잡음으로써 왕조 교체의 결정적인 힘을 얻었다.

마침내 혁명파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정치와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대해 이색,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파 사대부들은 혁명파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군사력을 가지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혁명파는 권문 세족과 온건파 사대부들을 힘으로 누르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민심을 수습한 후, 마침내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1392).

근세 사회의 전개

조선 왕조는 왕조 교체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수습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고려의 구질서를 당분간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곧이어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고, 행정과 교통의 요지이면서 국민적 기대감이 컸던 한양으로 수도를 옮겨 국가의 새 면모를 갖추었다. 안으로는 숭유 정책과 농본 정책을 제시하고, 밖으로는 사대 교린2) 사대라는 말은 본래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국제 관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선진 강대국인 중국과 주변 제국이 명분상 중국의 연호를 쓰고,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것을 전제로 하여 중국과 조공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교린은 일본과 여진에 대한 평화적인 회유 정책을 써서 상호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외교 정책을 말한다.을 기본 외교 정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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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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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의 6조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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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립된 새 왕조는 표면상으로는 고려와 유사한 왕조인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큰 차이점이 있다.

첫째, 정치적으로는 왕권 중심으로 권력 구조를 바꾸고, 중앙 집권적으로 제도를 개편하여 관료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정비된 중앙 집권 체제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면서 모범적인 유교 정치를 추구하였다.

둘째, 사회⋅경제적으로는 양인의 수가 증가하고, 양인의 권익이 보다 신장되었을 뿐 아니라, 자영농의 수도 전보다 더 늘어났고, 경작권이 보장되었다. 그리고 과거 제도가 정비되면서 능력이 보다 존중되었다.

셋째, 문화적으로는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고,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정신 문화와 국민 생활에 기여하는 기술 문화를 크게 진작시켜 민족 문화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사회는 고려에 비하여 보다 더 진전된 사회로 발전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사회를 근세 사회로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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