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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Ⅳ. 근세 사회의 발전
  • 2. 근세의 정치와 그 변천
  • (1) 정치 체제의 확립

(1) 정치 체제의 확립

정치 사상

조선은 유교의 덕치주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구현하는 데 그 이상을 두어, 중앙 집권적 양반 관료 체제를 이루었다.

고려 말기부터 추진해 온 숭유 정책은 새 왕조의 기본 정책으로서,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들어온 주자가례의 채용, 소학 교육의 장려 등으로 유교는 상류 사회로부터 민중의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성리학에서 강조된 명분론은 국제 관계에 있어서는 존화 양이(尊華攘夷) 사상을 내세워, 처음에는 배원 친명책을, 17세기에는 존명 배청의 정책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사상 정책에서는 불교와 도교 및 토속 신앙까지 이단 음사(淫祀)로 몰아 배척하는 이론으로 작용하였다. 또, 그것은 사회적으로는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와 가족 제도에 응용되었다. 즉, 양천과 반상이 엄격히 구분되고, 신분에 따른 직역이 법제화되었으며, 가부장 중심의 가족 제도가 점차 보편화되어 친족 관념의 강화를 가져왔다. 경제적으로는 지배층의 농민 지배를 긍정하는 사회⋅경제 관계를 유도하여 지주 전호제를 관철시키려 했으며, 주인과 종의 관계를 군신 관계처럼 종적 질서로 편제하려 하였다.

유교 정치에서는 언론과 학문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유교적 통치 이념에 입각하여 군주의 독재와 관료의 횡포를 견제하고, 신민의 여론을 반영할 수 있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또, 어진 정사를 실현하기 위한 배려로 경연(經筵)과 서연(書筵) 제도를 마련하여 국왕과 세자의 학덕을 배양하는 한편, 여론을 정책에 반영시키기 위한 상소 제도, 때에 따라 백관과 민중의 의견을 묻는 구언 제도 등이 있어서, 학문과 언론이 정치를 이끌어 가도록 하였다.

정치 사상으로서의 성리학은,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더불어 조선 사회에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이로써 성리학은 예학의 발달과 함께 국가 정책의 차원에서 옹호되었고, 사림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 세계의 차원에서 강조되었다.

정치 구조

조선의 정치 기구는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잘 명시되어 있다. 통치 기구는 크게 경직과 외직, 동반과 서반으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경국대전의 반포로 그 법제적 기틀이 확립될 때까지의 노력은 중앙 집권화의 길이었고, 동시에 정치 제도의 정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정치 기구는 도평의사사가 의정부로 개편되면서 모든 권력이 왕권을 중심으로 세분되었다. 즉, 도평의사사가 가지는 행정권만이 의정부로 이행되었고, 군사권은 삼군부로, 간쟁권은 3사로, 재정권은 호조로, 왕명 출납권은 승정원으로 각각 이관되면서 조선의 기본 정치 체제의 골격이 이루어졌다.

중앙의 기본적인 정치 구조는 의정부와 6조의 체계로 편성되었다. 의정부는 최고 관부로서, 재상들의 합의를 통하여 국정을 총괄하였다. 6조와 이에 딸린 여러 속관은 직능에 따라 행정을 분담하였으며, 고급 행정 관원은 정책 결정에 참여하여 기능적 분화와 통일성을 조화시켰다.

이 밖에, 정책 결정 및 집행 과정의 착오와 부정을 막기 위하여 간쟁과 감찰 기관으로서 사간원과 사헌부를 두었다. 이를 양사 또는 대간이라 불렀다. 대간은 서경(署經)이라 하여, 임명된 관리의 신분, 경력 등을 조사하여 그 가부를 승인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또, 정책 결정과 행정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등을 두고, 국왕과 대신이 한자리에 모여 학술과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 제도를 두었다. 그리고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과 왕의 특명에 의하여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가 있었는데, 이들은 왕권의 강화와 유지를 위한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그 밖에, 수도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한 한성부가 있었다.

지방 행정 조직은 고려 시대에 비하여 크게 정비되어, 전국을 8도로 나누고, 도 아래에는 부, 목, 군, 현을 두었다. 도에는 관찰사를 파견하여, 관내 군현의 목민관인 수령들을 지휘, 감독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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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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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8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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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은 직접 관내의 주민들을 다스리는 지방관이었고, 이들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조세와 공물의 징수였다.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모든 지방 행정 단위에는 중앙의 6조에 상응하는 6방의 조직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 사무는 토착의 향리들이 향역으로 세습하면서 담당하였다.

군현 아래에는 면, 리, 통을 두고, 향촌 주민 중에서 그 책임자를 선임하여 수령의 정령을 집행하게 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권이 향촌의 말단에까지 미칠 수 있었다.

한편, 새 왕조를 개창한 신진 사대부는 이제까지 군현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향리를 배제하고, 양반 중심의 향촌 사회를 확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사심관 제도는 경재소와 유향소로 분화, 발전하게 되었다. 즉, 향촌의 덕망 있는 인사들이 유향소를 구성하여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규찰하면서 지방 행정에 참여하였다. 또, 초기부터 경재소를 수도에 두어, 유향소와 정부 사이의 연락 기능을 맡게 함으로써 정부와 향촌을 직접 연결시키고, 유향소를 중앙에서 직접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향촌 자치를 허용하면서도 중앙 집권을 효율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된 것은, 백성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커진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백성이 지방 세력가의 임의적인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을 뜻한다. 한편, 고려 시대에 광범하게 존재했던 속현과 특수 행정 단위인 향, 소, 부곡이 점차 소멸되고, 인구의 증가와 자연 촌락의 성장에 따라 면⋅리 제도가 정착되어 간 것도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교통과 통신, 그리고 운수 조직이 정비되어, 물자의 수송과 통신 연락, 그리고 여행이 보다 신속하고 편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에는 역원제와 조운제 및 봉수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군역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 조직을 강화하여, 국방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군역은 양인 개병과 농병 일치를 원칙으로 하였다. 즉, 16세 이상 60세에 이르는 양인 장정들은 누구나 군역을 져서, 현역 군인인 정군(正軍)이 되거나 군인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봉족)이 되어야 했다. 그것은 양인인 농민이 자유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권리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였다. 노비는 권리가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군역의 의무가 없었으나, 필요에 따라서는 특수군으로 편제되기도 하였다.

군인은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었다. 5위를 기간 부대로 하는 중앙군은 궁궐의 수비와 수도의 방비를 담당하였다. 중앙군은 정병을 비롯하여, 시험에 의하여 선발된 사람, 왕족과 공신, 고급 관료의 자제들로 편성된 특수병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고급 군인으로서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지방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어 건국 초기에는 국방상의 요지인 영⋅진에 나아가 복무하였고, 그 일부는 교대로 수도에서 복무하였다. 그리고 세조 이후로는 전국 군현을 지역 단위의 방위 체제로 편성하는 진관 체제(鎭管體制)를 실시하였다. 지방군은 의무 병역으로 징발된 정병들이지만,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를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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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군사 조직
조선 시대의 군사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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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규군 이외에 잡색군(雜色軍)이라는 예비군이 있어서, 전직 관료, 서리, 향리, 교생, 노비 등 각계 각층의 장정들이 참여하여, 평상시에는 본업에 종사하면서 일정한 기간 동안 군사 훈련을 받아 유사시에 향토 방위를 맡게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개병제의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져서, 세종과 세조 때에는 정규군이 약 15만 명에서 30만 명 정도였으며, 보인과 잡색군을 합하면 모두 80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의 군사력이 있었다. 한편,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역 대상자를 조사, 등록시키는 호적 제도와 호패 제도를 강화하였다. 쓰시마 섬을 정벌하고 4군 6진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국방력의 증강에 힘입은 것이다.

교육과 과거 제도

교육 제도는 관리 양성 또는 과거 준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양반 자제를 중심으로 학제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비하여 교육 기관이 증설되고, 교육의 기회도 훨씬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문관 양성을 위한 유학 교육만이 숭상되었고, 기술학인 잡학은 천시되었으며, 무관을 위한 교육 시설은 거의 없었다. 인문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에 성균관과 4부 학당을 두었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각 군현의 인구에 비례하여 정원을 책정하였다.

전국의 학생 정원은 대략 1만 6천 명 정도였으나, 16세기 이후로 내려올수록 정원 외의 학생이 증가해 갔다. 학생들은 초등 교육 기관으로 전국 각지에 설치되어 있는 서당(서재)에서 한문의 기초를 익히거나, 4학이나 향교에 진학하여 소과에 응시하였으며, 합격자는 생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었다. 성균관 유생 및 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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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의 문묘 대성전
성균관의 문묘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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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문과, 무과, 그리고 특정한 기술을 시험하는 잡과의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문과 지망자는 원칙적으로 생원, 진사 시험을 거쳐서 성균관에 입학한 다음, 다시 대과인 문과에 합격해야 요직으로 나갈 수 있었다.1) 요직으로 나가거나 빠른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비록,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응시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교육의 기회가 양반에게 거의 독점되다시피 했으므로, 일반 양인층이 합격하는 예는 많지 않았다. 무과 지망자는 무예 시험을 거쳐 무과에 합격해야만 높이 등용되었다. 무과의 실시는, 고려 시대에 비하여 문무 양반 제도가 확립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잡과에는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의 네 부분이 있어서 사역원, 형조, 전의감, 관상감 등 여러 관서의 특수 기술관을 선발하였는데, 이들 기술학의 교육은 각기 해당 관청에서 맡고 있었다. 무과와 잡과 응시자는 서얼과 중간 계층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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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제도
과거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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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간단한 시험인 취재를 거쳐서 서리나 하급 관리로 나갈 수도 있었으나, 이런 경우에는 요직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과거는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 이외에도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수시로 행해졌다. 또, 학덕에 의한 천거로 관료에 임용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문음에 의해 특별히 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출판 문화의 발달로 서적이 많이 보급되어, 가정이나 서당에서의 초등 교육이 쉬워졌고, 16세기 이후로는 관학 이외에 서당의 보급과 함께 서원이 설립되면서 교육의 기회는 더욱 넓어졌다. 이와 같은 교육의 발전은 과거 제도의 정비와 함께 조선 왕조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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